내면으로의 여행 — “열심히 하라” 말하기 전에
방향을 잃은 최첨단 선박의 최후
“축구”라는 종목의 매력에 빠지게된 계기
축구라는 스포츠에 평소 관심이 없던 내가 본격적으로 이 종목을 탐닉하게 된 것은 지난 2002년 월드컵이었다. 이 국제적인 행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하나되어 “하나가 된 팀”을 응원했다. 길거리 응원도 그렇고, 학교에서도 한국 대표팀의 선전이 항상 화제였다. 당시 국가대표의 성적을 위해 이례적으로 선수들의 소속팀에서 일찍 차출시켜 다른 나라팀과는 상대적으로 훨씬 많은 합숙훈련 기간을 가져갔다는 논란이 있었지만, 어쨌든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기대이상의 호성적으로 국민들의 기대에 보답했고, 한동안 이로인해 많은 국민들이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때 만큼 온나라의 사람들이 단합하여 무언가를 향해 같은 곳을 바라본다는 느낌이 없을 정도였다.
내가 축구를 좋아하게 된 것은 어쩌면 축구 그 자체의 매력이라기보다는, 이 처럼 서로 이해관계나 살아온 배경이 조금씩 다른 사람들을 같은 언어와 정신문화를 공유한다는 이유로 단합시켜 줄 수 있는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했기 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이든다. 나중에는 축구라는 종목 안에서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전술의 미학과 발로 공을 때렸을 때 시원하게 골대안으로 빨려들어가는 쾌감에 깊게 빠지기는 했다. 그러나 내가 축구에 매료되었던 그 시발점은 축구를 하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다른 사람과 연대감을 느끼고 또 그것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였다. 내게 축구는 그 어떤 종목에 비해서도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 “팀 스포츠”로 보였다.
팀 스포츠는 “개개인이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모두가 힘을 합쳐 최대한 협력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전재를 담고있다. 야구에서는 오타니 쇼헤이, 테니스에서는 로저 페더러(Roger Federer), 농구에서는 마이클 조던(Michael Jordan)등 각각의 스포츠 종목에서는 언제나 그 분야를 대표하는 거물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종목들은 한 두 명의 특출난 개개인의 뛰어난 퍼포먼스로 결과를 상당수 뒤집을 수 있는 요지가 있다. 야구와 농구 역시 팀 스포츠이기는 하지만, 축구에 비해서 뛰어난 소수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부분이 상대적으로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이러한 종목에서는 일부 뛰어난 멤버만으로도 준수한 다수를 압도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다.
그러나 축구는 소수의 뛰어난 선수가 팀을 우승으로 이끌기에는 훨씬 더 어려운 종목이다. 과거의 펠레(Pele)나 마라도나(Maradonas)가 국가대표에서 그렇게 많은 우승컵을 들어올릴 수 있었던 것은 그와 같이 플레이하는 동료들의 수준도 상당히 좋았기 때문이다. 재작년에 월드컵을 우승한 역대 최고의 축구 선수인 리오넬 메시(Lionel Messi)역시 거의 2000년대 후반 부터 혜성처럼 나타나 초반에는 엄청난 우승 트로피들을 휩쓸었지만, 국가대표에서 그가 남미의 대륙컵인 코파 아메리카(Copa America)와 월드컵 우승은 거의 선수 말년에 가서야 가능할 정도였다. 오히려 선수로써의 황혼기에 가까운 시점에 국가대표에서 의미있는 업적을 이룬 것이다. 그만큼 축구는 혼자 혹은 몇 명이 잘해서는 그 어떤 성취도 장담하기 어려운 종목이다.
모든 사람이 제 역할을 다해야 잘 할 수 있는 “팀"
그러니 축구에서 팀으로써 의미있는 성취를 이루기 위해서는 필드에 있는 11명의 선수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움직이며 같은 방향을 바라보아야한다. 누가 어디로 움직이면 나는 어디로 가야하고, 누가 누구를 마크하고 있으면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지 서로 약속이 되어있어야하며 그 약속된 움직임이 얼마나 필드위에서 효율적으로 나오느냐에따라 승패가 크게 좌우되는 스포츠다. 아무리 능력있는 개개인들이라 하더라도 전술적으로 합이 맞춰져 있지 않거나 전술적인 약속이 되어있어도 그것이 필드위에서 잘 표현되지 못하면 조그마한 실수에도 상대에게 치명적인 기회를 내어주기가 쉬운 상황들이 펼쳐진다.
이 것은 다른 분야에 적용해 보아도 크게 다르지않다.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해야하는 상황에 놓인 군인들이 서로 약속된 전략적 움직임이 없거나 싸울 의지가 부족하다면 그 군인들이 아무리 전투 경험이 많다고해도 상대적으로 전투력이 훨씬 더 약한 군대에게 처참하게 패할 수 있다. 최근에 일어난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점령의 배경에는 미군의 철수도 있었지만, 탈레반에 맞서 싸우려는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의 안이함도 매우 큰 원인으로 평가받고 있다(2). 미국은 거의 20년간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약 한화 2600조원(한국 국방예산이 최근 50조원인 것을 감안하면 그에 50배에 달하는 금액이다.)을 투입했다. 그러나 이렇게 막대한 금액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탈레반을 축출하는데 실패했다.
아프간 정부군은 탈레반을 만날 때마다 쉽게 투항하거나 쉽게 탈영하기 일쑤였다. 때문에 탈레반은 상대적으로 열악한 자금력에도 불구하고 정부군에게 사상자 없는 승리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처음에 정부군 병력은 30만이 넘었고 탈레반은 이의 5분의 1 정도인 6만 ~ 7만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이는 부패한 아프간 정부군의 거짓된 군인 장부 기록인 것으로 드러났다. 미군이 투입한 수백조의 예산은 부패한 정부 관리와 군 지휘관들이 횡령하였고 실제 가용가능한 병력은 탈레반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적은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부패한 관리와 지도자들이 이끄는 국가의 정부군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당연히 병사들도 사기가 없고 무엇을 위해 싸워야하는지도 몰랐다.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장악은 월남전 미국이 패배해 공산세력인 북베트남에의해 점령당한 시간보다 훨씬 더 빨랐다. 탈레반은 정부군에 비해 훨씬 더 단합되고 치밀한 전략으로 반탈레반 세력이 강한 서부 및 북부 지역을 빠르게 점령하였고, 동시에 미군이 정부군에게 제공했던 무기와 탄약들을 다수 빼았았다. 한마디로 아프간 정부군은 “돈만 많은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내부에서부터 부패하여 아예 군인들 스스로 전략이나 전술을 논의하지도 못했고, 심지어 싸워야하는 동기부여도 충분치 못했다. 탈레반에 비해 훨씬 더 훌륭한 군사력을 갖출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부정부패와 어리석음 때문이었다. 이렇게 각 조직의 구성원이 제 할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니 제 아무리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미국이 뒤를 보좌한다고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이라는 “팀"은 미국이라는 최첨단 이지스함을 뒤에 둔 작은 군함이었으나, 스스로 제대로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알아서 탈레반이라는 바위에 부딪혀 난파해버렸다.
시작부터 자멸의 조짐이 보이던 한국이라는 “팀"
최근 한국 대표팀이 이제 곧 막을 내릴 <2023 카타르 아시안컵> 대회에서 보여준 모습은 그러한 “팀"으로써의 안타까운 자멸을 떠올리게 했다. 이번 대회에서 한국팀은 역대 그 어느 때보다도 유럽의 메가클럽 및 빅리그에서 주전 혹은 준주전으로 활약하는 선수들이 많아 크게 기대가되었다. 헌데 감독의 선임에 대해서는 불신과 불만이 많이 흘러나왔다. 제대로된 감독 선임 절차를 밟지 않고 독단적인 리더의 선택에 의해 누군가를 선택했다. 문제는 그 누군가가 감독 커리어내내 불성실하고 안일한 태도로 임했다는 사실이었다. 일부 비판이 계속되었을지언정, 그래도 어쨌든 축구협회장이 선택을 한 것이니 이유가 있겠지하고 많은 사람들이 넘어갔다. 코치진의 경력도 화려한 인물들이 있어 기대감을 갖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평가전을 치르면서 중원을 비우고 극단적으로 공격수만 올리는 상대적으로 구시대의 축구를 구사하는 모습을 보였다. 많은 전문가들과 비평가들은 그런 전술이 수비를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는 것으로보였다. 예상대로 미드필더들에게 과부하가 오는 모습이 몇차례 보였고 상대의 역습에 너무 쉽게 무너지는 모습들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그러한 비판을 신경쓰지 않는 모습을 보였고, 오히려 자신이 하려는 것을 언론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식으로 받아쳤다. 분명히 약점이 보이는 전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각만 고집하면서 피드백을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들을 보였다.
이후 이어지는 인터뷰들에서는 아예 본인이 질문리스트를 받고 그 중에서 답하기 편한 것들에만 답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전혀 대중과 소통하는 모습은 없었고 그럴듯한 말로 넘어가기 바빴다. 감독으로써 자신의 업을 대하는 태도역시 상식이하였다. 틈만 나면 자리를 비우고 자신의 집이 있는 미국으로 날아갔다. 거기서 다수의 언론사를 만나면서 감독의 역할보다는 셀럽으로써 활약하기 바빴다. 또한 이미 한국의 주축 선수들을 체크하러 간다는 이유로 유럽에도 자주나갔다. 유럽파가 부족한 포지션에서는 국내파들로 채워야하는데, 어떤 선수가 우리팀에 부족한 것을 줄 수 있을지를 파악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다. 당연히 국내 프로리그를 참관해서 취약한 포지션을 메우려는 노력을 전혀하지 않았고, 그러한 모습에 다수의 축구팬들은 불만을 토로했다. 그가 그런 모습을 보였기에 그런지 그와 같이 일하는 독일인 코치진들도 한국에 머무르지않고 유럽에서 원격근무를 하면서 유럽에서 뛰는 선수들을 체크했다고한다. 감독과 코치진 그 어느 누구도 한국팀을 지휘하고 다듬는데 있어 전혀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평가전에서는 압승하는 모습을 보여줬지만, 본격적으로 아시안컵 토너먼트에 들어가면서 부터는 그가 그동안 보여준 문제점이 매우 확연하게 드러났다. 수비를 안일하게 대하는 그의 태도는 한국팀이 모든 경기에서 거의 골을 먹고 시작하는 상황을 만들어냈고, 그러한 상황에서 선수 개개인의 번뜩임과 창의성으로 동점 및 역전을 만들어내는 상황을 반복했다. 궁극적으로 감독이 보여주고자하는 전술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1년 전까지만해도 강팀 우루과이와 호각으로 싸우고 포르투갈을 이긴 그 팀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감독은 지난 수차례 평가전을 통해 나타난 한국팀의 문제점을 전혀 개선하지 않았다. 선수들의 개인능력과 정신력에만 기대는 90년대 후진 한국축구의 모습이 다시보였다. 충분히 16강이 확정되어 교체선수들을 활용해 체력안배를 해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축선수들을 혹사하는 선택을 했다.
문제는 사람의 정신력은 체력에서 기인하는데, 그 체력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이다. 16강 이후 3일 단위로 120분을 연속으로 뛰어버린 선수들이 지치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했다. 그래서 그런지 4강 요르단전에서는 선수들이 후반에 들어가 곧바로 지친 모습을 보여주었다. 감독은 무슨 고집인지 지친 선수들을 교체하는데 소극적이었고, 결국 그의 안일함은 우리 선수의 실책과 그 실책을 놓치지 않은 상대편의 환희로 돌아갔다. 그렇게 상대편에 주도권을 내주고 난 후 지칠대로 지친 우리팀의 선수들은 제 아무리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다고해도 그것을 발휘하지 못했다. 상대방의 치밀한 수비 전술에 꽁꽁 묶여 공격한번 제대로 하기 어려웠다. 전술 자체가 부재했던 한국팀이 체력도 바닥난 상태에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결국 유효슈팅0개라는 치욕적인 결과를 안고 씁쓸하게 우승의 문턱 앞에서 좌절했다.
비효율적인 “체력"과 “정신력"에만 기대는 옛날의 한국 축구는 그 처참한 말로를 다시 드러냈다. 전술없이 소수의 특출남에만 의존하려고했던 한국이라는 “팀"은 시작부터 그 말로가 정해져 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 전에 전술을 떠나 감독이라는 업자체에 너무 태만했던 사람을 한국이라는 최첨단 선박의 선장으로 삼은 순간부터 자멸의 길로 들어선 것은 아닐까? 아프간이 스스로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훨씬 열악한 조건이었던 탈레반에 너무 쉽게 패한 것처럼, 한국팀도 그 자신보다 훨씬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했던 요르단이라는 팀에게, 그것도 이미 본선에서 상대해본 팀과의 재대결을 너무도 안이하게 준비했다는 점이 많은 이들의 마음을 씁쓸하게했다. 그리고 그런 안일함은 선수들의 노력과 무관하게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선장에 의해 요르단이라는 바위에 전속력으로 부딪히는 참사를 낳았다. 패배 그 자체보다는 상대적으로 더 작은 존재에게 제대로 공격한번 해보지 못한채, 허무하고 굴욕적으로 졌다는 사실이 많은 사람들에게 모욕감을 안겼던 것이다.
열심히 노를 젓는 선원들과 안락의자에 누운 선장
한국 팀은 마치 노를 저어 나아가는 최첨단 선박처럼 보인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최첨단 유흥 시설을 내부에 갖춘 선박이지만 그 엔진은 인력거인 노젓기로 돌아가는 역설적인 배다. 그 노를 젓는데 있어 선원들은 최고의 체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선박을 지휘하는 선장은 매우 안일하고 본인은 쳇바퀴를 돌지 않으면서 그나마 맡겨진 방향키를 잡지도 않는다. 그저 알아서 파도가 이끄는대로 움직이는 “방향이 없는, 겉만 멀쩡한 선박이다.”이런 배에서 일하는 선원들이 너무 불쌍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가? 엔진도 석유나 가스를 통해 자동으로 돌아가는 배가아닌 원시적인 인력으로 움직이는 배고, 심지어 방향을 지휘해야하는 선장은 나침반도 보지 않고 근처의 항구와 교신하지도 않는다. 방향성도 없이 세계 최고의 체력을 가진 선원들로 비효율적인 운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배가 침몰하는 것은 어쩌면 시간 문제에 불과하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역사적으로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는 다수의 선원들과 안일하고 방향성 없는 소수 리더들에 의해 비효율적으로 굴러갔다. 임진왜란때 무능함으로 조선군에 상당한 전력적 손실을 남긴 원균(1540~1597)이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3). 정유재란이 발발하기 6개월 전인 1597년 2월, 그는 이순신 장군의 자리를 꿰차고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그는 이순신의 작전지휘본부를 바로 첩의 거처로 만들었다. 유성룡의 <징비록>에 따르면 그가 이순신의 자리를 차지하기 이전에도 여러차례 전략 논의에 참여하지 않고 첩들과 놀면서 술주정을 부렸다고한다. 이때부터 그는 조선군을 이끌 수 있는 재목이 전혀 아니라는 매우 강한 사인이 보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부족한 리더쉽과 안일함으로 안골포와 가덕도에 자리잡은 왜군에게 큰 피해를 당했다. 마지막으로 출정한 거제 칠전도에서 왜군과 대립하다가 궤멸되어 도망쳤고, 적의 기습을 받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전쟁이 그 악명높은 “칠전량 해전"이었고, 조선이 왜군에게 충청와 전라를 점령할 수 있는 길을 내어준 빌미가 되었다. 이 전쟁은 조선군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가운데서 패한 유일한 전쟁으로 기록되어있다(4).
원균이 그가 자신은 리더가 될 수 없음을 이순신의 자리를 차지하기 전에도 그의 행위를 통해 매우 크게 알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선조의 결정으로 그는 조선 수군의 리더가 되었다. 방향키를 제대로 잡지 않는 선장이 이끄는 조선이라는 군함은 “칠전량 해전”을 통해 유일하게 임진왜란 중 왜적에게 패한 경험을 역사에 기록하게 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유능한 장교들과 병사들을 희생시켰다. 그리고 리더가 되지 말아야할 사람이 감투를 쓰는 역사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그 현상이 정말 뻔히 보이는 영역이 축구판이라는 점은 이 스포츠를 순수하게 좋아하게된 한명의 팬으로써 정말 안타깝고 분한 마음이 든다.
“열심히 하라”고 말하기 전에 생각해보아야할 것
필드위의 11명의 선수들은 정말 최선을 다했다. 정말 본인들의 힘이 닿는데까지 “비효율적으로" 자신의 있는 힘을 끝까지 짜내서 4강까지갔다. 전술을 논의하면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 리더 아래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시스템 아래에서 오직 자신들의 개인 능력만으로 한국이라는 배를 결승선 문턱으로 가져가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러한 비효율적인 “정신력"과 “체력" 축구는 그 한계를 보였다. 굳이 다시 보지 않아도 될, 수십년간 반복적으로 목격한 한국 축구의 실수가 데자뷰되었다.
선수들은 감독을 끝까지 감쌌으나, 감독은 선수들 탓을하며 비겁한 모습을 보였다. 원균이 칠전량 해전을 이끌때도 이런 모습이었을까? 그 모습으로 그는 애초부터 우리 한국팀을 지휘할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정말 명백하게 각인시켰다. 선수들의 노력이 그 순간 완전히 빛을 바래버린 느낌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까지 오느라 수고했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기회마져 스스로가 본인의 안일함과 직무태만을 변호하는 옹졸함으로 차단해버렸다. 이러한 리더아래서 도대체 그 훌륭한 기량의 선수들이 어떻게 마음을 다잡고 뛰었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이번 일로 한국축구국가대표팀은 굉장한 신뢰를 잃었다. 역대 최고의 능력을 가진 선수들로 구성된 팀의 여정은 매우 허망하게 마지막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굉장히 씁쓸한 맛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마음껏 공격하며 호각을 다투었던 다른 우승 후보들인 이란, 일본, 호주 등의 국가와 비교해서 그 끝이 너무 초라했다. 꽤 우수한 해군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칠전량 해전에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패배해버린 원균처럼, 상대 분석과 전략을 세우는 감독의 기본적인 임무도 등한시하는 인물이 이끄는 한국팀은 대회가 끝나도 존경의 대상이 아닌 조롱의 대상이었다. 대회가 끝나고 그를 칭찬하는 국내외 언론이나 미디어가 거의 없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요즘 젊은 것들은 XX가 없어!”, “주변 탓 하기전에 노력을 해라!”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세상은 변할 조짐이 보이지 않고, 잘 나가고 잘하는 다른 사람들은 많은데, 본인은 문제가 없고 이 세상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면 당연히 그 사람이 정말 노력해서 자신의 삶을 바꾸려 했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본인은 엄청 노력했는데도 불구하고 잘못된 시스템 아래서 잘못된 리더에게 지시를 받으면서, 그가 가리키는 잘못된 방향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과연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것이 과연 “열심히”하고 말고의 수준에서 논의가 될 수 있는 사안일까? 시작부터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배 안에서 선원들이 아무리 열심히 노를 젓는다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암초를 향해 전속력으로 나아가는 배는 도대체 그 행위에 대한 의미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그라운드위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한국팀 주장의 모습을 보면서 무능한 지휘관 아래서 고생한 임진왜란당시 조선의 수군 장교와 아프간-탈레반 전쟁에서 아무것도 해보지 못했을 일부 정부군 관료들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상하관계가 있는 대부분의 오늘날 다양한 사적/공적 조직에서는 아무리 직원들이 유능하다고한들 그들을 이끄는 사람들이 제대로 방향을 잡지 못하면 그 어떤 성과도 낼 수 없다. 그러니 그 어떤 조직에서도 다른이들에게 “열심히 하라"고 말하기 전에 과연 개개인의 노력이 의미를 낼 수 있는 환경인지 먼저 돌아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끼?
주장 손흥민 선수는 지금까지 4번의 아시안컵에 출전했고 단 한번도 우승하지 못했다. 그의 나이가 이제 선수 생활 황혼기를 바라보는 다음 대회는 정말 그가 전성기의 여부를 떠나 선수로써 대회에 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가 그 대회에 나올지 말지는 미지수이지만, 그래도 열악한 상황에서 열심히 최선을 다한 그의 활약에는 매우 큰 박수를 쳐주고 싶다. 그가 선수들을 이끌며 보여준 리더로써의 모습과 내/외부의 시선들에 대해 적절하고 예의있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선수 이상으로 인간으로써 더욱 존경하게된 대회가 아닌가 싶다.
이제 30대 초반을 바라보는 그의 나이에 현실적으로 그가 우승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는 않을 것이다. 클럽팀에서도 그렇고 국가대표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메시가 선수 황혼기에 월드컵을 우승한 것처럼, 손흥민 선수도 결국 그런 길을 마지막에 밟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 그때가 되면 지금 유럽에 진출한 한국선수가 더 많아지니 스쿼드가 더욱 두터울 것이고, 그와 같이 열심히 뛰어줄 수준급의 선수들이 더 많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모든 것이 지금의 잘못된 리더가 감투를 쓰는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면 한낱 백일몽에 불과할 것이다. 선수 생활의 마지막에는 그가 의미있는 성취를 개인이 아닌 팀으로써 할 수 있도록 반드시 필요한 변화가 제때 이루어지기를, 그의 국가대표팀 은퇴시기 이전에 마지막으로 한번 더 바래본다.
참조:
(1) https://mobile.newsis.com/view.html?ar_id=NISX20240207_0002619527
(2) https://www.joongang.co.kr/article/24128320#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