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으로의 여행 — 자연스러운 사랑과 행복
진정으로 자연스러운 것은 성숙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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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오늘도 사랑과 삶에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알랭드 보통의 <우리는 사랑일까?>의 한 부분을 탐구해 보려해!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는 “자연스러운 사랑과 행복”이야.
“물론 행복한 감상주의야 바람직하지만, 유쾌증을 태평하게 행복감과 같은 것으로 취급할 수 없다. 행복한 영혼이 웃는 것은 그가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일몰이 아름답거나 애인이 방금 전화를 걸었거나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 유쾌증에 사로잡힌 이들이 행복한 것은, 단지 그들이 불행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유연하게 통합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유쾌증이라는 것이 정신과학적으로 정의된 의미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단지 알랭드 보통은 “애써 행복하려고 애쓰는 혹은 그 상황을 과장해서 억지로 표현하는” 사람들을 특정 정신 상태로 칭하기 위해서 이 개념을 만들어 낸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연스러운 행복을 맞이할 때보다, 억지로 항상 행복하고 즐거워야한다는 압박을 받으며 부자연스럽게 행복한 척을 하는 적이 더 많은 것 같다.
특히 이러한 증상은 SNS가 등장하면서 더 심해졌다고 느껴진다. 인스타그램이나 트위터에서는 하루가 달리 셀렙들의 비싼 옷과 음식, 그리고 이국적인 휴양지의 풍경이 수시로 올라온다. 그러한 허상에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요즘은 일반인들도 일상 생활과는 동떨어진, 환상적인 장소에서 멋진 드레스나 열심히 가꿔온 몸매를 드러내며 자신의 외모나 재력 등을 과시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설사 본인들이 그런 장소에 가고, 그렇게 입고 먹는 일이 일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할 정도의 희귀한 의식이라고해도, 본인이 수백만장자 셀럽들과 뒤쳐지지않는다는 것을 알리고 싶은 것인지 FOMO(Fear of Missing Out, 남들이 하는 것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박탈감)의 심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게시물들을 계속해서 올린다. SNS를 하는 사람들이 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절대적으로 더 많은 시대인 요즘, 사람들은 역사상 그 어느때보다 점점 더 자신을 과시하고 남들에게 뒤쳐져있지 않다는 것을 알리려고 노골적인 노력을 한다. 더 많은 수의 좋아요와 더 많은 찬양 댓글을 원하고, 그 것이 광고수입과 직결되는 현실에서 인플루언서(Influencer)가 되기위한 전쟁은 그 어느때보다 치열하고 소모적이다.
그러한 과시가 시시각각 이루어지는 현실에서는 조그만 것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매우 크게 과장해서 표현하는 문화가 점점 더 강해지게된다. 순수했던 어린시절 서로가 처음 만났던 대학로앞 허름하지만 클래식한 카페에서 수십년이 넘게 아직도 커피를 타고계신 아주머니가 만들어주신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데이트를 한다는 것은 구시대적이고 센스없는 선택이된다. 번화가에 새로생긴 매우 세련되고 화려한 디자인의 카페에서 한 끼 식사와 비견되는 가격의 커피를 마셔야 나를 그만큼 사랑한다는 표현이된다. 손을 잡고 데이트를 하면서 젊은이들의 거리에서 파는 아기자기한 느낌의 액세러리를 사는 것보다, 비싼 명품샵에 들어가 수백만원짜리 다이아몬드가 박힌 목걸이를 걸어주면서 청혼을 받고 싶어진다. 점점 더 비싼 것, 럭셔리한 것에 사람들은 집착하고, 그러한 화려한 물건에 어울리도록 자신의 외모를 화장하거나, 성형하거나, 혹은 보정 어플로 다듬는다. 그렇게해서 화려한 모습에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자신이 특정 브랜드의 옷이나 액세서리를 쓴다는 것을 노출시키면, 그 명품 브랜드의 마케팅 관계자들이 혹시라도 본인에게 협찬을 제의할 것이라고 믿는다. 어떻게 해서든 어느 상황에서도 화려하고, 세련되고, 매혹적인 모습을 보여주려하고, 그 중심에 자신이 있어야한다. 다른 사람들의 워너비가 되고 싶은 마음에, 자기 자신을 계속 속이며, 본인이 왜 화려한 것을 원하는지 질문도하지 않은채 단지 사람들의 관심과 부러움을 사고 싶은 마음에 본인 스스로를 SNS의 화려한 가상세계에 가두어 버린다. 그 안에서 표현되는 나는 무조건 행복해야한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으니까.
과장된 삶에 너무 많이 노출되거나, 스스로의 감정을 속이고 부자연스럽게 본인이 맹목적으로 믿는 것에 대해 찬양한다면, 본인의 삶에 대해 허무감을 느낄 수 있는 속도도 그만큼 더 빨라진다. 앞에서는 자신을 칭찬하던 사람들이 본인의 뒷담화를 하기 시작하고, SNS에 달리는 댓글들도 관심이 더 커지면서 악플이 더 많아지기 시작한다. 도저히 입에 담기 어려운, 본인을 음담패설의 주제로 삼는 글들을 보면 상당한 심리적 충격을 받고, 일상생활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다. 아름답고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공주님처럼 찬양할 것이라 여겼지만, 본인을 성적환타지물에서 보는 인물들과 별 차이없는 존재로 보고 소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되면 자신을 지키기 힘들어진다. 익명의 장소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모른다는 생각때문에 더 거칠어지고 무례한 인간의 본성이 더 쉽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많은 관심은 그만큼의 댓가를 요구한다.
본인의 감정에 충실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시선과 인정에만 매달린다면 자연스러운 자신만의 행복을 만끽하기 어렵다. 아무리 엄숙하고 성스러운 자리라고해도, 때마침 개인적으로 힘든 일을 겪는다면 그 사람에게 온전히 그 순간 행복한척 연기하지 못한 책임을 무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생각이든다. 우리는 인간이 모순적인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한다. 단지 그 모순이 부자연스러운 방향으로 표출되거나 강요되어서는 안되는 것 뿐이다. 실연을 당한 사람이 친구의 결혼식에서 그 상처를 완전히 떨쳐버리고 광대처럼 행복한 척 연기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지도 모르면서 단지 외부의 압력이나 인정에의해 어떤일을 해야하는 상황은 자연스럽지않은 모순이된다. 부모님의 기대때문에, 그들이 좋아하기 때문에 의사, 변호사가 된다면, 과연 그 일을 진심으로 즐기면서 오래 할 수 있을까? 심하게 말하면 그것은 부모의 광대로 사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심각한 무례함을 초래하거나 피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면, 모든 사람은 현재 자신이 느끼는 솔직한 감정에 충실하고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보고 그 방향을 찾아나가야할 책임이자 권리가 있다. 그 주변인 또한 개인의 그 자유로운 선택에 대해서 선을 넘는 간섭을 해서는 안된다. 본인이 그의 삶을 책임지고 평생 걱정없이 먹여살려줄 것이 아니라면. 개개인의 상황과 차이, 취향과 선택을 인정하는 것이 진정으로 성숙한 사랑은 아닐까? 그렇게 성숙한 모습이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서로 존중하고 서로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자연은 성숙해지려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행복을 선사하는 것 같다. 어쩌면 성숙한 것이 자연스러운 것은 아닐까?
“런던발레단에 대한 앨리스의 농담은 매우 가벼운 것이었지만, 밥이 그것을 알아차리는 데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유쾌증 환자들은 수많은 일에서 재미를 찾지만, 단 한 가지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신들이 관여하는 활동의 성공과 진지함에 매몰되어서, 모순을 인식하는 폭이 좁다. 그들은 바나나 껍질을 밟고 넘어지는 사람을 보고 웃지만 자기비하는 꺼리며, 본인의 성격이나 인간 본연의 깊은 결함과 때로 우스꽝스러운 습관을 드러내는 걸 피한다.”
자연스럽게 행복해지는 것에 필요한 또 하나의 자세는 “유머러스한 자세”를 잃지 않는 것이 아닐까한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웃음의 소재로 삼는데에는 무척 관대하지만, 자기 자신을 보고 웃는 것에는 매우 민감하다. 같이 노를 젓는 카누를 탄 친구들 사이에서 본인이 합을 맞추지 못해 배가 뒤집힌 상황을 상상해보자. 유머러스한 누군가라면 “얘들아 미안, 나 카누 레슨을 좀 받아야할까봐 하하. 어디 좋은 선생 아는 사람있어?”하면서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유쾌하게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본인의 자존심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는 이들은 “나는 그 때 제대로 하려했어 그냥 운이 없었던 거야.” 아니면 “나는 아냐, 혹시 네가 잘 못해놓고 나한테 화풀이하는 거 아냐? 무례한 놈이군.”하며 되려 상황을 악화시키면서 얼굴에 철판을 까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잘못을 웃음거리삼아 가볍게 넘기는 지혜가 부족하거나, 자신의 에고(Ego)에 대한 애착이 강한 이들은 본인이 실수를해도 자존심 때문인지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한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이 부정당하고 무너질까봐 겁난다.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웃음거리가되면, 본인은 평생 남들의 안주거리가 되어 살아갈거라는 지나친 두려움에 매몰된다. 이런 사람들은 남들의 가벼운 유머(심지어 본인이 유머의 대상이 아니라고해도) 그 말에 웃음을 터뜨리지 못하고, 점점 남들과 공감하지 못한다. 스스로를 유머의 대상으로 삼지 못하니, 스스로를 웃어넘길 수 없고, 스스로 자존심을 꽁꽁감싸니 타인에게 방어적으로 변한다. 그렇게 스스로를 표현하는 에너지를 막아버리니, 남들에게 자신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남들역시 그렇게 계속 어두워지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게 타인과 나누는 에너지의 질량이 줄어드니, 소통도 줄어들고 다른 사람들과 공감을 느끼기 어려워진다. 그 사람은 점점 다른 사람들에 얼굴을 맞댄채 이야기하고 싶은 존재가 아닌, 보지 않을때 이야기하고 싶은 존재가된다. “유머”가 사라진 사람에게는 “루머”가 더 많이 생길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이것일까?
유머가 있는 이들은 자연스럽다. 그런 사람들은 누굴 만나든, 본인이 먼저 손을 내리며 상대방의 눈 높이에 맞춰 무릎을 꿇는다. 심지어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그들의 유머 감각 덕분에 상황을 모면하기도한다. 유머러스한 사람들은 성숙하다. 본인의 잘못을 반성하지만 그렇다고 그 상황에 너무 매몰되지 않는다. 늪에 빠졌어도 빠져나오면 훌훌 털어버리고 “오늘 부츠가 조금 미끄러웠네”하고만다. 유머러스한 사람들은 매력적이다. 스스로의 잘못에 함몰되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도 관대해진다. 그것을 비난하기 보다는 공감하고, 너그럽게 용서하여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마치 꽃을 가꾸는 듯이 다른 사람들을 대한다. 태양처럼 본인의 따쓰함을 전달해 줌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성숙의 광합성을 할 수 있는 영양분을 준다.
성숙한 사람들은 자연스럽다. 그들은 진정한 자신의 행복에 대해 생각한다.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보다는 스스로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는다. 본인이 행복한 선택을 더 많이하니 자연스럽게 본인의 삶에 대해 점점 더 만족한다. 본인의 삶에 대해 충분한 행복감을 느끼니, 본인이 잘못하거나 실패하더라도 그 행복감이 튜브가되어 다시 본인을 세상의 바다에서 수면위로 뛰워준다. 본인의 잘못으로부터 배우지만 그 것에 대해 자책하지 않고 웃어 넘길 수 있으니,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도 엄격할 이유가없다. 타인의 실수에 대해 관대해지니 그들에게 더 공감할 수 있고, 그 공감은 다른이가 성숙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된다. 타인을 만날 때 전혀 누구에게도 어떠한 압력도 주지않는다. 누구에게나 편한 존재가되어 만나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좋은 본보기가 되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성숙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 다른 사람이 가까이하고싶은 유머러스한 사람, 그런 사람이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사람”이 아닐까?
참조:
(1) https://pixabay.com/photos/field-cereals-summer-sun-sunshine-192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