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Blogging — DS — Break 1–2
가상현실이 집어 삼킨 인간의 현실
# 가상 현실, #가상 타인, # 가상 정체성, #가상 시스템
오늘 한일:
어제 <블레이드 러너 2049>라는 영화를 봤다. 가상현실이 인간의 현실을 집어삼킨 21세기의 중반을 그린 영화를 통해, 인간의 삶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한번 깊게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현대 사회는 무한한 기술 발전의 시대이다.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그 발전의 속도가 빠르며, 인간은 최초로 자신과 자신이 사는 이 지구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만큼, 지구 온난화, 온실가스, 기후 변화 등 인간이 황폐화하는 지구의 환경 문제도 대두되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인간의 기술이 발전할 수록, 편리함을 추구경향 또한 끝을 모르고 치솟아 조금의 불편도 참지 못하며, 무한한 경쟁이 계속되며 타인을 공감하고 배려하는 능력 또한 점차 퇴화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사실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지만, 그 크기와 존재감이 너무 커져, 정작 인간이 살고 있는 자신들의 “현실"보다 더 크게 느껴지고 있다. 오늘의 글은 이 영화를 통해 어떠한 면에서 인간이 가상현실을 실제 현실보다 더 크게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은 무엇인지, 작품에서 드러난 가상현실의 3가지 요소를 통해 조명해 보고자 한다. 가상의 정체성(나), 가상의 타인(너), 그리고 가상의 체계(시스템)등이 그 것이다.
가상의 정체성(나)
영화에서 주인공은 K라는 이름의 요원이다. 정확히 말하면 KD6–3.7. 그는 자신의 조직에서 유능한 요원으로 인정받으며 살고 있었다. 그는 그의 조직에서 그에게 맡겨진 임무를 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수십년전 사라진 전설적인 요원 “데커드"의 행방을 쫓는 임무를 받고 나서, 잊고 살았던 그의 한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으려 한다.
그의 이름은 사실 K가 아니다. 그의 조직은 그에게 스스로의 정체성을 생각하지 말기를 촉구한다. 그저 로봇과 같이, 조직에 충성하고 자신이 맡은 일을 문제없이 처리하기를 바랬다. 그러나, 매일 같이 그의 집에 돌아오며 그를 맞아주는 가상의 여자친구 조이는 그러한 그의 모습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에게 조(Joe)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난생처음, 코드 번호가 아닌 이름으로 불려진 그는 굉장히 묘한 감정을 느낀다.
그의 이름은 사실 이름이라기 보다 조직내에서 그를 구분하기 위한 그의 코드이다. 마치 백화점의 수많은 진열대 상품들을 구분하기 위한 바코드 처럼.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현재 우리가 않고 있는 많은 사회적인 문제들, 특히 직장이나 조직에서 일어나는 성차별, 임직원 간의 보상에 대한 매우 큰 격차 등, 그리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가장 크게 대두된 문제는 개개인의 사생활과 사적인 정보의 침해이다. 이에 대해 각국에서 문제를 해결할 가장 좋은 방법으로 개개인을 코드화 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개개인의 사생활과 사적인 정보가 포함된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게한다는 명목아래, 모든 조직 내에서 개인을 최대한 단순화 시켜 이름이 아닌 코드로 부르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누가 정말 어떤 이름을 가지고, 어떤 사람인지 같이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알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서로 아무런 개인적 정보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적인 대화를 할 수없고 그로 인해 사생활 침해가 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의 대화는 사내 기밀을 유지한다는 명목아래 감시되고 녹음되며, 모든 이가 말하는 모든 내용이 그들의 사원증에 부착된 녹음기를 통해 도청된다. 만약 조직을 와해하는 정보를 흘리거나, 조직내 지배층에게 도전하는 말들은 모조리 처벌의 대상이 될 것이다.
2049년의 미래도 영화에서 그려진 것처럼 한 개인의 정체성을 없애고, 그저 한 조직의 구성원처럼 개개인을 이름으로 부르기 보다 코드화 시킬까? 2049년의 미래가 지금보다 더 자유롭고, 모든 이가 더 행복한 사회가 되기 보다,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이용하여 모든 이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통제하지는 않을까 우려가 된다. 그 어느때보다 기술은 발전했지만, 그것을 이용해 부를 축적한 사람의 수는 그 어느때보다 적은 것이 현실이다. 전세계 90%이상의 사람들은 10%도 안되는 부를 위해 아웅다웅하고, 전세계의 10%이하의 사람들이 90%이상의 부를 누리고 있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인공지능, 자율주행차, 빅데이터 등등이 4차 산업으로 떠오르고 있으나, 그만큼 이 기술들의 이점을 이용하여 소수만이 부를 독점할 가능성도 그 어느때보다 커지고 있다. 모든 사람들의 데이터를 이용하여, 모든 이를 중앙통제하는 영화가 그려낸 가상현실이 그렇게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이다.
오직 돈과 권력을 가진이들만이 그들만의 정체성을 누릴 수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각자 개개인이 아닌 한 조직에서 자신의 맡은 일만하는 구성원로써 여겨지는 사회는 비단 영화에서 뿐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그렇다. 워낙 삭막한 경쟁 사회에서 모든 이들이 하루 하루를 전쟁처럼 살아서 그런지,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에 따라, 내 주변의 사람이 누군지 관심도 없고, 관심도 가지려 하지 않는다. 혹시라도 그렇게 했다가 내가 뒤쳐진다거나, 다른이에게 온정을 베풀다가 오히려 자신이 피해를 입거나 소문에 휩싸일까 두렵다. 조직이나 회사에서는 내 할일만 하고 퇴근해서 내 삶을 누리기 바쁘다. 매일 같이 충돌하며 일하는 회사사람들은, 같이 잘 지내는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밖에서는 절대로 보고 싶지 않은 왠수들이다. 이런 환경에서, 사람들이 서로를 각자 소중한 개인으로써 대할 수 있을까? 그냥 내 인생에서 아무 중요성도 차지 하지 않는 그져 스쳐가는 엑스트라일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게 진정으로 행복으로 가는 길일까? 사회적으로 소통이 줄어들 수록 갈등은 점점 심해지고, 점점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로 부터 떨어지기를 원하고, 이는 사회적인 분열을 낳고 또 다른 갈등을 낳는 악순환이 된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하는데, 미래 기술이 발전하면 그러한 인간의 특성도 바뀌게 될까? 우리가 진정으로 타인과 교감하지 않고도 행복을 성취할 수 있는 존재일까? 단 한명의 진정한 친구 없이 나 스스로 나만의 시간을 갖고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정도는 한계가 있지 않을까? 타인이 나의 존재감을 아무도 느끼지 못하고, 그저 나를 하나의 상품처럼 취급하며 바코드로 부르기만 하는 삶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구를 완전히 배제한 상태에서의 인간의 행복 추구는 가능한 것일까? 다른이를 한 개인으로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자신도 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혼자서 스스로만이 자신을 인정하고 느끼는 상황에서는, 개개인은 더 공허하고 외로워지지 않을까?
가상의 타인(너)
K는 집에 돌아오면 자신을 반겨주는 조이라는 가상의 여자친구가 있다. 이 조이는 사실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한 가상의 여자친구 인공지능으로써, 영화속에서는 매우 인기있는 상품이다. 그 말은 그 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 모두가 그녀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어쨌든 그녀는 그가 원하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비록 그녀는 실체가 없어 그녀가 그를 안아도, 실질적으로는 느낄 수 없지만, 그는 그녀가 실재로 존재한다고 믿으며 그녀의 체온을 느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녀는 그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아니 그렇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영화 중반에 그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를 실제로 느껴보고 싶었던 조이는, 실제 인간 여성에게 부탁하여, 그녀를 통해 그를 만지려고 한다. 그 여성의 몸에 자신을 싱크하고나서, 그녀는 그를 어루만지고, 그에게 키스한다. K는 달콤한 그녀의 입술, 정확히는 다른 인간 여성의 입술을 통해 그녀를 느낀다. 그역시 매우 묘한 감정에 빠진다. 그녀는 그를 위해 조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그를 K가 아닌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한다.
영화 후반, 그녀는 그가 조직을 배신하고 탈출을 감행하자, 그를 뒤쫓는 조직의 배후 세력에 아무런 정보를 내주지 않기 위해 그가 도망가기전 자신을 파괴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그럴 수 없다고 하며, 그녀가 담긴 AI스피커를 가져간다. 영화의 클라이막스 이전, 그녀는 결국 그를 뒤쫓는 세력에 의해 파괴되지만, 영화속에서는 진심으로 한 인간 남성을 사랑한 여성처럼 그려진다.
나는 여기서 최근에 새롭게 논란이 되고 있는 “인공지능 이성친구"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앞으로는 인간 여성의 모습이 인공지능과 결합하여, 모든 남성에게 최적화된 “상품"으로써 존재한다고 생각해보자. 연애가 힘들다고 생각하는 많은 남성들은 이제 비싼 물질적, 정신적 비용을 들여가며 연애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환호한다. 집에 오면, 영화속 조이처럼 내가 그리던 이상형의 모습을 한 여성이 따뜻하게 나를 맞아줄 것이다. 그녀는 내가 집에오면 나를 감싸안아주며, 나와 기쁜마음으로 잠자리를 할 것이다. 나의 기분이 어떻든 그것을 너무 잘 알고, 그에 맞게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 줄 것이다. 영화 HER에서 처럼, 내가 다른 여성에 대해 이야기 한다면, 그녀는 나에게 질투하기도 하는 귀여운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그 어떤 인간 여성보다도 나에게 맞는 존재일 것이며, 더 이상 인간 여성의 환심을 사려 노력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것은 어디까지나 나에게 맞는 모습이라기보다, 나에게 “맞춰진 모습"은 아닐까? 아무리 매력적인 여성의 모습을 한 인공지능이라도, 그것이 나를 진정으로 좋아하는게 아니라, “나를 좋아하도록 프로그래밍된” 존재를 어디까지, 또 언제까지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그렇게 영혼없이, 나의 노력으로 쟁취한 사랑이 아닌, 가상으로 만들어진 사랑안에서, 나의 공허함과 외로움이 더 커지지는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타인은 “나의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각자 특별한 하나의 존재로써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모든 사람이 나의 마음대로, 나의 취향에 맞추어지는 것 만큼 안타까운 것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세상이 과연 얼마나 재미있을까? 그런 세상에서 개인은 더 큰 공허함을 느끼지는 않을까? 무언가 아무런 노력없이 거져 얻을 수 있는 세상이 그 누구에게나 그렇게 오랬동안 흥미롭게 남아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세상에서는 “쓴 맛을 보는 과정의 보람됨"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성장의 달콤함"을 맛볼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인정하는 만큼, 타인의 특별함을 존중해 줄 수 있어야, 삶은 더 흥미롭고 가치있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이러한 가상의 이성친구에 열광하는 것이, 그만큼 사람들 사이에 공감이 결여된 현실을 잘 보여준다는 생각도 하게된다. 사회적으로 겪는 여성의 성차별과 폭력에 공감하지 못하는 남성들, 반대로 남성이 겪는 사회적 압력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는 여성들, 성소수자들이 그들의 성 정체성을 인정 받지 못하는 현실 등,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여러 다른 그룹들 사이의 갈등이 그만큼 깊어졌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서로가 서로를 적대시하고 소통도 하지 않으려는 많은 사람들을 보며, 또는 자신의 말과 생각에 지나치게 공감하지 못하는 이들을 보며, 차라리 나에게 최적화된 인공지능을 통해 그러한 연대감에 대한 결핍을 해소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결국 영화 후반부에 가서는 조이가 주인공과 갈 수록 깊은 사랑에 빠지면서, 그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는 끝내 인간에 의해 파괴된다. 인공지능이었던 그녀는 진심으로 그를 사랑했을까? 아니면 그를 계속 더 깊게 사랑하도록 설계된 것일까? 주인공은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한 것일까, 아니면 사랑했다고 믿고 싶은 것일까? 결국 그녀가 파괴되는 모습에서, 인공지능 이성친구는 아무리 아름다운 겉모습을 하고 있어도, 끝내는 허상에 불과하다고 영화는 말해주고 싶은 것이 아닐까? 실존한다고 믿고 싶은 거짓의 타인, 그것이 가상으로 만들어진 인공지능의 실체라는 메시지를 영화는 관객에게 던져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
가상의 체계(시스템)
영화속 세계는 개개인의 존재가 사라지고, 조직의 일원으로써 코드 네임을 가지고 살아가는 주인공을 담고있다. 이전에서 이야기 했듯이, 개인의 정체성은 무시되고, 조직의 정체성만이 남는 세계이다. 발전된 기술을 바탕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의 다양한 개성을 소셜미디어 컨텐츠를 통해 드러내고 있는 지금 세상에서는, 약 30년 후의 세상을 그린 영화속의 세계가 그렇게 가깝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서 분명 정부 등 중앙 집권적인 조직들은 언제든지 21세기의 자원이라 불리는 데이터를 이용하여, 개개인의 일거수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 모든이의 건강을 보호한다는 명목아래, 정부는 확진자의 나이와 사는 지역, 이동 동선을 공개하였다. 결과적으로 이름 및 그 이상의 신상정보는 공개하지 않으면서, 많은이가 현명한 대처를 했다고 평가하고 있지만, 반대로 마음먹기에 따라 이 정보가 다르게 사용될 수 있다는 위험성도 보여준 사례였다. 서구 사회의 일부 사람들은 한국을 개인의 인권침해를 통해 방역을 이루어 냈다고 폄하하는 인물들이 있다. 이러한 견해는 실제로 잘못된 마음을 먹은 권력자가 이러한 정보를 사용했을 때, 전혀 다른 목적으로 쓰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영화속의 예시는, 데이터라는 자원을 바탕으로 개개인을 지배하는 사회이다. 개개인의 몸에 칩을 부착시켜, 개개인이 무엇을 하는지 감시한다. 이를 바탕으로 거대한 조직은 개개인이 정체성을 가질 필요가 없으며,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잘 해내면서 생존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개인의 정체성을 찾으려하는 모든 노력은 감시되고 처벌될 것이기 때문에 헛된 꿈을 꾸지 말라고 강요한다. 그렇게 해서 모든이들을 종속적이고 권력앞에 굴종하는 존재로 만드려한다. 그들이 만들어낸 “개인이 없고 조직만 있는" 가상현실에 순응하며 살기를 원한다. 데이터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쓰였을 때, 얼마나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지, 영화는 지금 우리 한국의 현실과 대조하여 생각해 볼 수 있게 했다.
몇 년전 JTBC의 <말하는 대로>라는 프로그램에서, 한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미술 작가 정중원의 길거리 강연을 본적이 있다. 하이퍼리얼리즘은 실재의 인물들이나 사물들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미술 기법을 말한다. 너무 사실적이어서 실재 사진보다 더 입체적이다. 정중원 작가는 이러한 미술기법을 통해 “가상현실을 현실"이라고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태도를 꼬집고 싶다고 하였다. 음식점에 가도 음식 자체보다는 거기서 찍을 SNS사진이 메인이고, 열심히 공부를 하는 이유도 앎의 재미를 알아가거나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남들이 보기 좋은 대학, 보기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삶에서 “나"는 없고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만 존재할 뿐이다. 거기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비난받고, 엄청난 저항을 받는다. 가상현실에 집어삼켜버린 현실은 비단 영화의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존재하는 가상현실은 무수히 많다.
문제는 이러한 정체성을 부정당한 병든 개인을 양산할 수록, “우리"라는 가치만이 존중받고 그에 맞지 않는 것은 배척될 수록, 각 개인은 더 병들어 간다는 것에 있다. 부모님이 원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비난받을게 두려워 내 꿈은 포기하고, 남들과 똑같은 삶을 산다. 공부하는 것은 나중에 성공하기 위한 목적이며, 다른 것은 잘 모르겠다. 그런데 그러한 목적은 크게 와닿지 않아 배우는 것의 재미를 계속 모른체 기계적으로 외부적인 압력에 의해서만 공부한다. 다른 이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다는 두려움에 무언가를 하게된다. 자연스럽게 나의 의지가 아닌 “강압적으로 만들어 낸" 힘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마음가지 않는 일을 하게 된다. 그렇게 “우리"라는 공동의 가치를 지키위해, 개인은 무한한 희생을 강요받는다. 그렇지만, 그렇게 우리라는 가치를 더 채우면 채우려 할 수록, 그 것을 위해 자신의 것들을 빼앗긴 개인은 점차 공허해진다. 그 “우리"라는 것에 내가 언제 부터 속한지 모른채, 그 것에 속하기를 동의한 적이 있는지도 모른채, 개인이 빠진 “우리"의 가치를 다른 이들이 숭배하니 나도 생존을 위해 그렇게 할 뿐이다. 그것이 정말 올바른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어떠한 역사로 만들어 졌는지 알지도 못한채, 무조건 적인 “우리"에 대한 권위에 순종하게 된다. “나" 개인은 그 “우리"라는 것에 대항해 보잘 것 없다는 생각에 감히 내 목소리를 낼 생각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우리"라는 것은 결국 실존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실존하는 개개인이 서로 연대감을 가지고 “우리"라는 것을 믿을 뿐이다. 결국 “우리"도, 현실에서 존재하는 “개인"들의 집합이라는 말이며, 결국 “개인들이 믿는 가상현실"이라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가 지금 까지 살아남은 능력이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능력”이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그 보이지 않는 것이 정말 진실된 가치인지 아니면 판타지에 불과한지 질문하지 못한 상태에서 믿는 것은 인간의 삶에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믿어 왔던 가치가 더 이상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면 그 것의 진정한 가치를 재고 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좋아하는 또 하나의 프로그램인 <영화당>의 123화에서, 패널 중에 하나인 소설가 김중혁은, <데이니쉬 걸>이라는 영화를 리뷰하면서 “인간이 현실에 집중할 수록 판타지는 약해지지만, 판타지가 강해지면 현실은 더욱 비참해진다.”고 말했다. 진정한 우리의 현실에 집중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무런 생각없이 “우리"라는 판타지안에 같인 이들의 현실은 더욱 고달플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영화 속 주인공인 조는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얻어, 자신이 오랫동안 몸 담았던 조직에서 탈출을 시도한다. 조직의 비밀요원들에게 잡혀 기절하기도 하고, 매우 큰 위험에 빠지지만, 격렬한 대립과 격투 끝에 그들을 모두 물리치고, 오래전 탈출에 성공한 데커드라는 요원을 구출하여 결국 자신도 그와 함께 자신을 옭아 매던 가상 현실에서 탈출에 성공한다. 매우 큰 부상을 입은 그는 결국 흰눈이 가득한 장소를 배경으로 천천이 쓰러져 눈을 감는다.
가상 현실을 탈출하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 영화를 보고나서는, 나 또한 내가 있는 가상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은 생각보다 매우 힘든 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다른이들의 반감과 저항이 매우 두렵다. 그러나,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유를 위해 기꺼이 그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탈출을 시도하는 주인공을 통해, 자유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충분히 댓가를 치르고서라도 얻을 만한 가치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영화 말기에 “올바른 가치를 위해 죽는 것은 가장 인간다운 것이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20세기 이전까지 역사의 화두는, 인간들이 왕족이 지배하는 봉건 제도에서 해방되는 것이었다면, 21세기는 인간 자신들이 만들어낸 가상의 현실에서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이 중심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그러한 가상현실을 가능케하는 인공지능 등의 기술과, 그 기술을 활용해 부를 누리려는 소수의 인간들이 그 저항의 대상이 되지는 않을까? 영화를 보면서, 인간의 투쟁의 역사는 인간이 멸망할 때까지 끝이 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시대가 지나면,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면서, 거기에 일찍 올라탄 이들은 기득권으로써 꽤 오랫동안 부와 권력을 누릴 것이고, 그로 인해 심각해진 불평등의 문제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저항을 불러오는 모습은, 시대가 지나도 반복되는 것 같이 느껴졌다. 결국, 우리가 만든 가상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그 것으로 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투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누구도 우리에게 자유를 그냥 주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선배들이 광주민주화 운동을 통해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것처럼, 프랑스 혁명으로 민주화의 불을 인류 역사상 처음 당긴 것처럼, 우리도 가상 현실로 부터 우리의 현실을 지키기 위해 “강한 개인들"이 하나로 뭉쳐 싸워야 하는 것은 아닐까?
앞으로 할일:
사실 이 영화는 필립 K.의 유명한 소설인 <안드로이드는 왜 전기양을 꿈꾸는 가?>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사실 굉장히 철학적인 작품이며, 특히 21세기에 매우 발전된 기술의 혜택을 누리며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자신들의 현재의 삶과 앞으로의 삶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해주는 유의미한 작품이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 앞으로 더 실제 같은 허구의 가상현실과 마주하여 살아가야 하는 내가, 앞으로 나에게 닥칠 수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고, 이에 대한 많은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이 문제는 비단 나에게만 국한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가상현실에 집어 삼켜버린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나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는 거짓된 “우리"보다 진실된 “나”의 정체성을 먼저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 안에서 참된 개인들이 모여 비로소 진실된 “우리"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또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타인이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이에 대해 분노 하기 보다는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아름다울 수 있다라는 새로운 관점을 가져야 하지는 않을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전제부터가 이미 고유의 영혼을 가진 “타인"을 부정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한 영혼이 없는 타인이 나와 깊은 관계를 가진다고 해서, 내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러한 결속력이 없는 “우리"는 너무도 공허해지고 말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너무도 견고하지만,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우리"는 속빈 강정에 불과하지 않을까? 그러한 현실성 없는 “우리"라는 조직이나 그룹은 너무도 크고 명백한 가상현실인 것은 아닐까?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을 지키지 못하고 그러한 가상현실에 억눌려 사는 것이 과연 행복으로 가는 길일까? 너무나 큰 가상 현실의 판타지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행복한 현실을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닐까?
앞으로 이러한 무수히 많은 질문들에 확답을 모두 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앞으로 더 예상하기 힘든 미래를 살아나갈 일이 많은 나와 독자들을 위해, 서로 계속 무엇이 의미있는 가치인지에 대해서 질문하기를 멈추지 말자는 것만 다짐하고 싶다. 그 것이 이렇게 빠르게 변화하고, 더 편리해지지만 더욱 더 어렵게 변하는 세상에서, 우리의 중심을 잡으면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영화는 약 30년 후 우리의 미래를 굉장히 암담하게 그려냈지만, 결국 주인공이 그 가상현실에서 탈출한 모습을 보며, 우리에게도 우리의 현실을 매우 큰 가상현실의 영향으로 부터 지켜낼 수 있는 힘이 있지는 않을까라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
참조:
(2) https://i.gadgets360cdn.com/large/blade-runner-2049_1520224726100.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