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으로의 여행 — 분노

배우는 자(Learner Of Life)
9 min readAug 1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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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자혐, #상처, #성찰, #철학, #평온

세상을 향한 험오는 결국, 나 자신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1)

왜 나는 화가 나 있을까?

오늘 오랜만에 아버지에게 연락을 취했다. 반갑게 맞아 주셨고, 지금 회사생활은 어떤지, 잘 지내는지를 간략하게 여쭤보시고, 동생과 연락은 하는지 물으셨다. 나는 동생과 따로 지낸후 부터는 자주 연락을 취하지 못했다. 그렇게 말씀을 드리고나서, 그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시간이 되면 한번 뵙자는 말을 마지막으로 드리려고 했으나 답없이 끊으셨다. 아버지는 전화를 끊으실때 제대로된 인사도 하지 않으시는 경우가 많다.

왠지 내 성의가 무시 당한 것 같고,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으신 것 같아 전화를 끝내면서도 기분이 씁쓸했다. 아버지와의 통화는 때때로 이렇게 불만족스러운 상태로 끝난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또 한번 더 전화를 드리기가 꺼려진다.

내가 소심한 녀석일까? 별거 아닌거에도 크게 의미를 부여하는 내 성격상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아버지에대한 그리 좋지 못한 기억이 많다. 아버지는 그걸 아실지는 모르겠지만, 항상 퉁명스럽고 까탈스러운, 나쁘게 이야기하자면 정을 붙이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타인에게는 상당한 신사라는 평을 받을지 모르지만, 내게는 성장하면서 별로 존경스러운 점을 찾기 힘든 사람이었다. 옛날 가부장적인 사람들이 그랬듯, 밖에서는 너그럽게 행동하지만 집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기 일쑤였다. 나는 그런 모순된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을 매우 경멸했었다. 다른 친구들과 같이 있을때는 별 문제 없이 행동하다가, 나랑 둘이만 있게 되면 치졸하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는 녀석들에게 어렸을 때 몇번 데이면서 두번 다시는 그런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인간들과 연을 이어나가야만하는 상황을 겪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가 성장하면서 그런 모습을 보이는 가족과 같이 생활할 수 밖에 없는 환경에 놓이니, 나 스스로 굉장히 많이 상처를 받으면서 트라우마도 많이 생겼다. 지금 가스라이팅이라고 일컫는 행위는 그 당시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인식되었다. 내가 무엇을 잘해도 칭찬을 받기는 힘들었고, 별거 아닌 일에도 불같이 화를 내셨다. 물론 가장의 무게가 옛날에는 더 무거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밖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가족들에게 푸는 모습을 볼때면 정말 하루라도 일찍 독립해서 따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지금은 재혼을 하셔서 별 문제 없이 사시고 계시는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잘 지내지 못하셨으면 히스테리가 더 심해졌을 수도 있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들로써의 최소한의 도리는 지키려고 노력하는데, 아버지의 태도가 변함이 없었다면 아마 평생 뵙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이미 아버지와의 대화는 많이 불편해진지 오래지만, 그래도 이제는 만날때마다 싸우지는 않는다는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환경에서 성장하지 못한 유년시절의 영향은 내가 성인이 되었을 때 생각보다 내게 많은 장애물을 맞딱드리게했다. 특히 다른 사람과 소통하며 감정을 나누고 관계를 유지해야하는 사회적인 면에 있어서 나는 매우 부족했었다고 느껴진다. 남들이 내게 이야기할 때 나는 그 사람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해 내가 다른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것처럼 받아들인 사람이 있었다. 직장에서 만난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본의아니게 첫인상을 잘못 심고 나니, 예의가 없는 사람처럼 받아들여졌다. 그 사람이 나에 대한 오해를 푸는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내가 일을 잘 처리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결국에는 설득할 수 있었지만, 내가 기본적인 사회생활의 지혜만 잘 갖추었더라도 겪지 않아도될 비용이었다.

아직까지도 나는 다른 사람에게 내 속마음을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못하며, 두루뭉실하게만 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내가 무언가를 숨기고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열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여져, 나와 친해지는 것에 대해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한창 교회에 다닐때 다른 사람들과 쉽게 친해졌던 합창단 리더형이 매우 부러웠었다. 그 사람이 말하기만 하면 빵빵터지고, 다른 사람들은 그 형에게 장난도 잘치는데, 내게는 그렇게 편하게 대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직까지도,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매우 진지하고 고상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쉽게준다. 톤이 매우 낮은 내 목소리도 그렇지만, 유머라는 것을 잘 구사해 본 적이 없어서 진지한 말만 하는데 익숙해서가 더 클 것이다. 유머라는 것은 스스로와 세상에 대해 너그럽고 여유로운 태도가 있어야 가능한데, 항상 누군가의 기대치를 충족시키기 위해 쫓기는 듯히 살았던 내게는 그런게 쉽지 않았다.

왜 나는 스스로를 혐오(자혐)할까?

지금도 나의 가장 큰 문제는 성급함이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거기서 성급함이 드러난다. 천천히 조금 더 신중하게 했다면 하지 않을 실수들을 잦게 한다. 유리잔을 들고 부억으로 가는데, 너무 성급하게 가다가 벽에 부딪히고 잔을 놓쳐 와장창 바닥에 깨뜨리는 일이 생각난다. 내가 천천히 앞을보고 걸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실수를 저질러 오히려 깨진 유리잔을 치우는데 두 배 이상의 시간이 든 것이다.

성급함은 이런 물질적인 면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별 것 아닌 일에도 나 스스로 성급하게 넘겨짚는 경우가 많다. 그냥 장난으로 내가 노안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 말에 상처를 받아 집에서 우울해질 때도 있고, 다른 사람은 별 의도 없이 바빠서 인사를 안하고 간 것인데, 혹시 나를 별로 안 좋아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을 하기도 한다. 그냥 일 처리를 잘 못해서 한 소리 들은건데, 조직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다는 마음에, 나는 그저 그런 놈이라며 계속 스스로를 괴롭히기도한다.

결국 세상 일이 내 뜻대로 빨리 되지 않거나, 내가 원하는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경우 이 성급함은 세상에 대한 불만족과 노여움으로 쌓인다. 삶이 라는 것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그런 상황이 너무 많이 부각되니 나 스스로의 삶에 대해서도 비관적으로 변하기 쉽다. 좋았던 일은 금방 잊혀지고, 상처를 받고 나를 힘들게 하는 일의 무게는 더욱 크게 느껴진다. 밤에 잠을 잘 때 과거에 괴롭힘을 받았던 기억때문에 힘들거나, 그런 일이 일어나는 꿈을 꾸고나서 아침에 일어나면 그 어느 때보다도 우울하고 힘들어진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고 출근을 해야하는 날에 그런일이 생기면 그 날 하루는 유난히 더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한국 사회의 환경도 나의 정신적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충분한 여유를 주지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 입시를 위해 달려야했고, 대학에 들어가서도 좋은 성적을 유지해야하고, 취업을 할때에도 다른이들과의 경쟁에서 이겨야한다. 그 과정에서 피드백이랍시고 정말 많은 지적과 매질을 감내해야한다. 나의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고뇌와 고민을 진심으로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존재는 적어도 내 주변에 존재하지 못했다. 살아있는 인간과 이야기하는 것 보다는, 소크라테스, 아우렐리우스, 마이클 샌델 등 훌륭한 고대와 근현대 철학자들의 저서를 통해 더 갚진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그렇게 독서를 할 시간이 많지는 않았지만, 자기 성찰의 시간들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더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존재로 거듭나도록 만들 수 있었다.

나를 구하는 유일한 방법

아무리 우리의 주의를 끄려는 시도가 역사상 그 어느때보다도 많은 시기라해도, 그 안에서도 자신의 길을 집중해서 가는 사람이 있다. 마찬가지로 고대와 근대시절에도, 세상의 많은 유혹들이나 혼란 속에서도 스스로를 잘 지켜내며 불행과 자멸의 가능성에 쉽게 자신을 내어주지 않은 영웅들은 존재했다. 여러 책을 통해 접한 소크라테스의 일화들, 니체의 일생, 마이클 샌델의 강연들을 통해 나는 그 어느 시대라도 자신의 윤리관을 부여잡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나는 그들이 보여준 것들에 공통 점이 있음을 알게되었다. “철학"이었다. 내 삶에 대해서 깊게 들여다보고, 나의 존재와 내 삶의 방향에 대해 질문할 수 있게 해주는 학습의 분야다.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인간이라면, 필연적으로 철학이라는 학습의 분야에 맞닥뜨릴 수 밖에 없다. 삶을 풍요롭고 올바르게 만들어 주는 것은 지혜(Philo)이다. 철학은 바로 이 지혜에 대한 사랑(Sophia)이다. 그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사람은 자신이 가는 방향에 대해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는 순간이 온다. 삶도 마찬가지로 그 안에서 자신이 어떠한 역할을 통해 세상에 기여하고 어디로 자신을 찾아가는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현대의 기계적이고 물질적인 산업화 사회에서, 특히 직장에서 이를 찾기란 매우 힘들다. 철학적인 사고는 물질적인 면을 넘어서야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은 그런 물질적인 환경에서 벗어나 나 스스로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여유가 매우 중요하다. 독서를 통해 스스로와 대화하고, 자신의 삶에 대해서 고찰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고, 나와 같은 고민을 한 현명한 선조들과 대화하면서 현실의 사람들과의 접촉에서는 얻을 수 없는 소중한 지혜를 얻을 수도 있다. 점점 더 많은 여유를 통해 스스로의 삶에 대해서 좀 더 깊게 생각해보고,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

넓은 세상을 본다는 것은 단순히 더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수많은 이성적 생명체가 존재하는 이 지구에서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공감”을 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똑똑하고 유능하다 한들, 다른 사람과 같이 살아갈 수 없으면 안된다. 나와 다른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고민을 같이 할 수 있고, 그들의 기쁨과 고통에 공감을 할 수 있어야 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 나 혼자 지식을 쌓는다 한들, 다른 사람들이 그대로 머물러 있다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더욱 힘들어진다.

다른 사람을 움직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에게 멋대로 충고나 조언을 하는 것이 아닌, 그들의 상황에 공감해주는 것이다. 아무리 맞는 말을 하더라도, 강압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건방진 어투로 말하면 옳은 소리로 느낄 수가 없다. 독서를 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의 아픔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그들의 처지와 삶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이 나아가서 나와 다른 조건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배려할 수 있게 해주는 가장 큰 원동력이다. 그러한 태도를 함양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더욱더 아름답고 평온한 사회가된다.

그렇다. 평온함. 성급한 내게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이다. 내 삶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불안에 쉽게 휩쓸리지 않으려는 것이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또한 세상이 원래 그럴 수 밖에 없는 성질을 가졌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다. 내가 제어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집착하거나 미련을 갖지 않아야한다. 그러자면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쉽게 판단을 해서는 안되고, 예측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걱정하기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그것에 최선을 다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다. 파도가 들이치더라도 최대한 흔들리지 않는 내 마음의 강력한 방파제를 구축하고 싶다. 삶을 사랑하는 태도는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독서를 통해 삶을 더 철학적으로 살고 싶다. 그렇게 해서 평온한 나 자신을 찾고싶고, 그런 평온한 나를 통해 더 세상을 평온하게 보고싶다. 혼란에 쉽게 휩쓸리지 않고 급하게 어리석은 결정을 하지 않기 위해서, 더 내 삶을 안정적이고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서.

(1) https://pixabay.com/illustrations/depression-voices-self-criticism-1250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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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배우는 자(Learner Of Life)

배움은 죽을 때까지 끝이 없다. 어쩌면 그게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배움을 멈추는 순간, 혹은 배움의 기회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순간, 우리의 삶은 어쩌면 거기서 끝나는 것은 아닐까? 나는 배운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배울 수 있음에, 그래서 살아 있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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