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으로의 여행 — 열등감의 중독성

배우는 자(Learner Of Life)
21 min readDec 28,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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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열등감"이라는 약을 끊기 힘든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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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처럼 나를 떠라려하지 않는 “열등감"이라는 녀석

아마 1달 전 쯤이었을 거다. 영화 <베놈 2: 카니지>를 보았던 때다. 전편을 매우 재미있게 본 나로써는 매우 기대가되었다. 이 영화는 마블코믹스의 유명한 <스파이더맨> 시리즈에 기반한 스핀오프(Spin-off)로써, 악역인 베놈을 선역화하고 주인공으로 삼아 제작되었다.

이 시리즈의 스토리는 “베놈"이라는 외계 물질이 숙주를 찾아, 그 숙주와 타협하고 그 숙주의 몸을 공유하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한다는 이야기이다. 베놈은 인간으로써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의 난폭함과 잔혹함, 허기를 가지고 있지만, 숙주와 합의하면서 그 본성을 조절하고 슬기롭게 이용하면서 살아간다. 그 목적이라는 것이 어떤 것일지는 시리즈가 한참 진행된 후에나 발견되겠지만, 이 시리즈에서 주목할 점은 한 몸에 두 개 이상의 목소리가 공존한다는 것이다.

나는 영화를 보고난 후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한 사람의 몸에는 여러 자아가 공존하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게 된 배경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끔 나조차도 나의 욕망이나 감정을 누르기 어려워 이성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 본성을 잘 이해하고 잘 이용하면 좋으련만, 삶에서 그렇게 하는게 생각보다 쉽지 않은 상황이 많이 펼쳐진다는 것을 경험하고 나서부터는, 어쩌면 내가 나 스스로를 제어한다는게 너무 터무니없고 매우 건방진 태도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지닌 본성 중 가장 이해하기 힘들면서도, 가장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열등감"이라는 놈이다. 이 놈은 본래 나와 다른 사람을 비교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렇게해서 내가 뒤떨어진다고 느끼면 갑자기 화가 나면서 질투심을 느낀다. 거기서 끝나면 좋으련만, 그 화살이 도리어 나를 향하곤 한다. “지금 나는 왜 이러지, 저 자식은 지금 엄청 잘 나가는데,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겨우 이 정도인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스스로를 비난하고 정신적으로 헤치기 시작한다. 이 것이 너무 잦으면, 나로 하여금 더 나은 삶을 갈망하면서 지금 내 상태에서 더 앞으로 나아가기가 좀 더 어려워진다. 나 스스로 내게 더 많은 상처를 내면서, 더 빨리 나의 에너지와 동기부여를 고갈시키기 때문이다. 결코 건강하거나 생산적인 태도가 아닌 것이다.

내가 나의 이런 상태를 누구에게 털어놓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별로 많지 않다. “그냥 조금 쉬면서 머리를 식혀.”, “어차피 불평해봐야 상황은 나아지지 않아, 그러니 조금 쉬었다가 다시 또 시작해봐.”, “네가 원하건, 그렇지 않건, 너 한테 주어진 것은 단 하나의 선택지 밖에 없어, 그냥 계속 나아갈 수 밖에.” 등등 결국 답은 정해져있다는 반응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반응을 부정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지금 힘들다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지금 일하는 곳을 과감히 때려칠 마음은 없다. 솔직히, 그 정도로 힘든 것은 아니니까. 아마 나보다 더 힘든 상황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분들이 더 많을 것이니까. 사실, 그 누구에게도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급격하게 바꾸어버릴 능력이 없다면, 계속해서 고난의 시기를 적어도 잠시 동안은 지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자신의 자리에서 꾸준히 노력하면서 새로운 기회를 조금씩 찾아 나가는 것 밖에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원래 세상에서 좋은 것들은 빨리 오지 않으니까.

이 사실을 이해하고 있고, 또 그 사실을 존중하면서 지금 내가 선 길에서도 굳건히 나아갈 마음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왜 나는 이러한 열등감이라는 녀석에게 휘둘리면서 종종 스트레스를 받는 것일까? 이 녀석이 내게 도움을 주기보다 더 해악을 많이 끼칠 놈이라는 걸 알면서도, 왜 나는 이 녀석이 목소리를 내게끔 놔두는 것일까? 그리고 그 목소리에 나는 왜 귀를 기울이는 것일까? 더 중요하게는, 마치 마약처럼 이 녀석을 끊어내지 못하고 왜 계속 이 놈이 내 몸을 숙주 삼게 놔두는 것일까?

내가 이해하는 것에 따르면, 우리는 몸과 정신으로 구분되어있다. 몸은 정신의 지시를 받고 행동하며, 몸의 움직임은 우리 정신의 표현이라고 말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이 “열등감"이라는 녀석도 내게 어떠한 감정을 느끼고, 내 몸으로 어떠한 행동을 하게끔 명령하려한다. 그렇다면, 이 열등감도 나의 정신 즉, 자아라고 볼 수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 것을 인정하기에는 매우 자존심이 상한다. 이렇게 퇴폐적이고 이기적이며, 더럽게까지 느껴지는 존재가 나를 지배하는 “자아"라고? 생각해보면 도무지 인정하기 싫다. 정말 이게 사실일까? 차라리 내가 별것 아닌 녀석의 말을 지나치게 집중해서 듣는 멍청이라면 인정하겠는데, 이것을 인정하는 순간 그 더러운 존재가 매우 강력하고 내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그림자라는 걸 받아들이게 되는 꼴이되는 것 같았다.

나는 이렇게 뭔가 꺼림찍한게 느껴질때마다 정말 다른 근본적인 이유가 없을까하고 깊게 생각하는 습관이있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나는 나의 감정과 생각을 지배하는 더 깊은 이유는 무엇이 있을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가장 먼저 나의 삶의 태도나 관점을 고려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들었다. 또한, 내가 특정한 방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게끔 유도하는 나의 주변 환경에서도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들었다.

열등감은 결국 감정의 한 종류다. 내가 느끼는 감정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므로, 결국 이 것은 피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더 깊게 들어가서 내가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마치 기계가 어떠한 동작을 하게되면 그렇게 하는 트리거(trigger)가 존재하듯이 말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가 갑자기 속력을 올리는 것은 페달을 밟았기 때문이고, 갑자기 속도를 늦추는 것은 브레이크를 밟았기 때문이다. 과학적으로 사고한다면, 특정 시스템에서 어떠한 입력값이 있어야 출력값이 나오는 원리를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트리거에는 어떤 것이 있을 수 있을까? 혹시, 나의 삶의 태도가 열등감을 내 내면의 왕국에서 가장 높은 신하로 등용시킨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들었다.

짜증과 분노

지난 몇 년간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불안감에 휩싸인적이 있었다. 큰 기대를 안고 나쁘지 않은 급여를 약속 받았던 회사에 입사했으나, 그곳에서의 일이 나와 전혀 맞지않아 대표님이 요구하는 기본적인 업무조차 처리할 수 없었다. 이전에 하던 일에서 전혀 비전이 보이지않아 큰 마음을 먹고 커리어를 바꾸려고 했으나, 처참한 실패로 돌아갔다. 이미 몇 번이나 이직을했고, 특별한 전문성을 갖추지 못한채 30대 초반의 나이를 맞이했다.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이제 나를 받아줄 곳은 있을까?”, “빚도 값아야하는데…” 등등걱정거리가 쌓여갔다. 이전처럼 몇 십개의 이력서를 정성들여 작성하고 내가 가고 싶은 회사는 커녕, 내가 갈만한 회사에 지원서를 꼼꼼히 넣어도, 면접조차 보자고 하는 곳이 많이 없었다. “아, 이제 내 인생은 이렇게 비참하게 꼬이는 건가?” 스스로 내 삶을 비관하면서 절망의 늪이 점점 더 내 다리를 깊은 곳으로 당기게 놔두었다. 친구도 많이 없었고, 모아둔 돈도 없었던 내게는 집 밖에 나가는 일은 면접을 볼 때 빼고는 거의 없었다. 나라에서 주는 실업급여로 연명하던게 불과 얼마전이었다.

그 상황에서 뭐라도 조금 내 뜻대로 안되는 일이 생기면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 화장실로 향하는데 발을 삐끗해서 넘어질 뻔했을 때, 나는 내 발로 서는 것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냐며 화를 내며 바닥을 쳤다. 또 하루는 오랜만에 면접이 잡혔을 때였다. 면접에 가야할 시간이되어 와이셔츠가 걸린 옷걸이를 옷장에서 꺼내려다가 다른 옷에 낑겨 쉽게 꺼내지지않자, 나는 홧김에 옷걸이를 집어당겼다. 그러자, 그 옷걸이가 부서지면서 옆에 걸린 다른 옷들의 옷걸이들을 내 얼굴로 던졌다. 옷이 걸린 옷걸이들의 집단 돌격에 내 이마를 한 대 맞았다. 나는 그 충격에 주저앉았고, 거기에 걸린 옷들은 자유를 얻으며 서로 헝클어지며 바닥에서 난장판을 만들었다. 옷 하나를 강제로 꺼내려다가 열 여개의 옷으로 방을 어지럽혀 버린 것이다. 그 때 서러움에 눈물이 났다. “하.. 진짜 난 이렇게 운이 없는 놈인가? 그래도 좀 더 나은 삶을 살아보려고 아둥바둥하는데, 하늘이 결코날 도와주지 않는구나..” 십 분후에는 집에서 나와야 버스와 지하철을타고 제 시간에 면접장소가 있는 서울 강남구에 닿을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자각하니 더 서럽게 느껴졌다. 그래도 빨리 정신을 차리고, 일단 재빨리 부서진 옷걸이에서 떨어진 와이셔츠를 홀딱입고, 다른 옷들을 재빨리 옷걸이들에 걸고 옷장에 쑤셔넣었다. 허겁지겁 자켓을 입고 향수를 뿌린다음 집을 나섰다. 내가 계획한 것보다 5분 늦게 집에서 나왔다. 조급한 마음에 빠르게 집앞의 정류장으로 뛰어갔으나, 내가 타려던 버스는 이미 정류장을 지나친 후였다. 한숨이 나왔다. 그 때 또 한번 화가났다. 하지만, 속으로 울분을 삼켰다. 다행히도 다른 버스가 곧 왔고, 그 날은 면접장소에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합격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내가 그당시 정말 서러웠던 것은, 일상의 작은 것들이 꼬이면서 조그마한 것조차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 때의 경험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는지, 나는 요즘도 왠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이 펼쳐지면 자주 욱하는 느낌을 받는다. 속으로 삭히려 노력하지만, 이를 악물면서 그걸 버텨내는게 때로는 너무 답답하고 속상하다.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보아도 그 사람을 축하하기보다는 내 삶과 비교하면서, 내 현재 상태를 비관하고 자괴감을 먼저 느끼게된다. 말 그대로 우리가 “자격지심"이라부르는, “열등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내가 “자격지심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내가 내게 일어나는 상황들에 대한 반응을 관찰해보고 있자면 마주할 수 밖에 없는 나의 그림자다. 조금이라도 더 너그러운 마음을 갖고, 이러한 열등의식을 제거해보려하지만, 마치 지병처럼 나를 도저히 놔주지 않는다. 무언가 내가 계획한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는 상황을 맞이하게되면, 이 열등감은 나를 꽉 쥐면서 속으로부터 무언가 끌어오르게 만든다. 마치 바람빠진 풍선을 꽉 쥐면, 모든 공기가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내가 원하지 않는 상황을 맞이할 때면 이 열등감은 나의 의식을 꽉 쥐면서 분노의 게이지를 모두 내 머리로 올려보낸다.

두려움과 공포

내가 한창 커리어를 바꾸려고하고 새로운 길에 들어서려할 때, 취업이 되지 않은 기간이 꽤 길었다. 그때는 내가 정말 옳은 선택을 한 것인지, 너무 세상을 쉽게 본 것은 아닌지, 심지어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 조차 스스로 내게 답하기가 쉽지 않았다. 방황의 기간이 지날수록 이 고뇌의 기간이 얼마나 길어질지 알 수가 없으니, 더욱 더 두렵기만했다. 그 두려움이 나은 감정이 불안감이며 공포였다.

불안한 마음에 이전에 하던 일로 돌아갈 생각도 해 보았다. 실제로 이전에 한 일에 관련된 회사들에 이력서를 넣기 시작했다. 상당히 많은 곳에서 면접을 보자는 이야기를했다. 그 회사들에 무작정 면접에 응하겠다고하고, 약 2주일 간 거의 하루에 한 번 꼴로 면접을 보았다. 면접에 가면서는 긴장되었지만, 두려움에 고뇌하는 기간동안 최선을 다해 면접을 준비했으므로, 불안감보다는 들뜬 긴장이었다. 면접에서 막힘없이 대답을 잘 했다고 생각하고 “그래 이건 됐다!”라는 마음으로 잘 될거라 확신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막상 며칠 후에 결과를 받고나서는 “귀하는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그 뒤는 뻔한 맥락이니 따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라는 문구만 메시지의 서론에 등장할 뿐이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생각해 보았다. 면접을 본 회사들에서는 “짧은 기간에 회사를 자주 옮기셨네요.” 라는 말을 거의 대부분 공통적으로 들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휴… 역시 긴 경력의 개구리(개구리처럼 이 곳 저곳 뜀뛰기 하는 것에 빗대어 전체 경력은 길지만, 자주 직장을 옮기는 사람을 가리킨다.)는 어디에서도 원하지 않는 것인가? 내가 이제 까지 쌓아온 경력이 5년 정도인데, 그 동안 회사를 5번 정도 옮긴 것이 나의 아킬레스 건 처럼 느껴졌다. 한국에서는 직장을 자주 옮기는 사람은 인내심이 없고, 그 무엇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물경력 취급을 받기 쉽다. 이 사실을 나는 3번째 이직을 할 때부터 깨달았다. 그래도 이전에는 면접 합격도 지금 보다 더 많이 받았었는데, 이제는 그 어디에서도 나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다보니 내가 과거에 이직하기로 마음 먹은 그 선택들이 매우 후회되었다. 이제는 사무직일을 할 수 없다면 몸쓰는 일이나 해야하는 것 아닌가하는 좀 극단적인 불안감까지 느껴졌다. 나의 미래에 대해 매우 비관적이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이후에 면접에서 더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불합격에 불합격이 계속 이어지면서, 점점 나는 더 어두운 곳으로 나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결국 해결책은?

내가 그동안 관찰한 바에 의하면, 짜증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태가 계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이어질 때 생기는 응어리"가 쌓이면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내 삶에서 아주 작은 일상적인 부분에서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일이 풀릴 때 그 응어리가 좀 더 커지는 느낌이다.

이를 해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내가 잘 모르면서 내가 해야할 일을 하게되면, 특히 그 일이 내가 즐기지 않는 것일 때 스트레스를 받기 더 쉽다. 그것을 “일”로써 느끼지 않는, 즉 “취미"를 갖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원하는 일보다는 자신이 해야할 일을 더 많이 하면서 살아간다. 다행히도, 워라밸이 중시되는 현대 사회에서는 점점 더 개개인이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기를 권장한다. 적어도 하루에 몇 시간 정도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 집중할 수 있는 여유를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지난 몇 년간 계속된 야근을 통해 느꼈다. 무조건 자신이 해야할 일을 처내기위해 죽어라 일만 하는 것은 그리 건강하고 효율적인 삶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차피 일을 쳐내도 새로운 일이 들어온다. 하루에 자신이 목표한 일을 최대한 끝냈다면, 그 이후의 시간은 온전히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좋다. 그 취미가 몸을 움직이는 것일수록 더 좋다. 내가 퇴근 후 집 앞에 있는 수영장에서 1시간 정도를 헤엄쳤을 때 물속에서 느껴지는 상쾌함과 시원한 느낌이 나의 스트레스를 어느정도 씻어주었다. 그러한 활동이 내가 다음 날 비교적 더 가뿐한 마음으로 나의 일상에 임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에너지가 건강하게 흐르지 못하면, 용암이 화강암으로 굳듯이 딱딱해지며 “짜증”이된다. 그 화강암이 계속 쌓이면 “분노”가 되어 화산이 되고, 그 화산이 폭발하면 이 세상이 매우 싫다며 강하게 소리치듯 세상에 젯가루를 뿌려 난장판을 만든다. 분노가 증폭되면 “혐오”가되는 것이다. 만약 활화산으로 폭발하지 못하고 사화산으로남으면, 아무것도 하지않은채 건강하지 못한 현실에 순응하는 “체념”이되고만다. 이 세상을 경멸하고 저주하며 살아가는 것이나, 이 세상이 자신에게 더 나아지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속에 살아가는 것은 서로 그 표현 방식만 다를 뿐, 둘다 죽지못해 억지로 살아가는 형태이다. 이 세상에 로또보다 더 희박한 확률을 뚫고 태어났는데, 그런식으로 남은 여생을 살아간다면 얼마나 비참하고 아까울까? 조금이라도 살아있을 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더 우리에게 주어진 이 황금같은 기회를 가치있게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일상에서 쉽지 않다면, 온전히 우리 자신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만이라도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며 살아갈 수는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게살자. 최대한 에너지가 응고되지 않고 흐를 수 있도록, 최소한 응어리들이 쌓여 화산이 되지 않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영역에서 스스로에게 원하는 것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

또한, 불안감은 본래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때 일어난다고한다.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진리는 미래를 대비하려 노력할 수는 있지만, 그 누구도 자신의 미래를 100%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난 일은 이미 일어났으므로 100% 사실이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는 단 1초 후에 일어나는 일이라도 예측해 볼수는 있지만 단언할 수는 없다. 나는 이 사실을 먼저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아무런 감정없이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불안을 해소하는 실마리를 찾아야한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감정이 필요없다. 아직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은 지식이나 정보에 해당하지만, 진실은 조금 더 깊은 곳에 있다.

당시 내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을 때 나에 대한 사실과 진실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내가 당시 취업을 하지 못하고 있었고, 내가 재취업을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내가 앞으로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의 미래가 밝지 않다고 느끼는 것은 사실보다 더 넓은 진실의 범위에서 바라보아야한다. 이 역시 진실의 넓디 넓은 영역에서 절대 참이 아니다. 나의 미래가 밝지 않다고 느끼는 것은 내가 아직 진실의 아주 작은 부분밖에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진실이 존재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렇다면 내가 아직 그것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직 내가 진실의 더 넓은 범위를 봐야한다는 뜻이다. 죽을 때까지 사람이 자신의 진실을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사람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삶의 의미, 즉 진실에 대한 탐구와 여행을 계속하도록 만들어졌다. 그렇기에, 아직 내가 아직 나의 진실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아직 갈 길이 멀다는 뜻이다. 아직, 내가 보지 못한 희망의 빛이 저 무한히 팽창하는 진실의 은하수 곳곳에 자리하고있다.

즉, 두려움은 더 넓은 진실의 바다를 항해하기 위한 설레임의 동력으로 사용해야한다. 더 깊은 수렁으로 나를 끌어들이는 늪의 손에 무기력하게 먹이로 넘겨주는 것이 아닌 것이다. 늪은 내 두려움을 먹이 삼아 나의 절망을 키우지만, 진실의 세계는 두려움을 나로 하여금 더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맞서게하는 성장의 동력으로 사용하게끔 유도한다. 그러니 두려움을 절대 그 자리에 두지마라. 불안감을 느낀다면, 지금 그 두려움을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동력으로 삼아라. 계속 움직이면서 그 불안감을 동력삼아 무언가를 하고 있다면, 이미 늪에 서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니까. 이것이 내가 불안감을 동력삼아 계속 이력서를 작성하고 면접을 연습할 수 있었던 동력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그렇게 계속 도전하다보니 생각보다 꽤 괜찮은 회사에서 다시 커리어와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두려움이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도록 내버려두지않고, 오히려 이를 동력으로삼아 나를 더 성장시키는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나는 계속해서 불안감을 느낄 것이다. 하나의 고비가 지나면, 다른 고비가 나를 기다릴 것이니까. 원래 삶은 그런 불안과 행복의 주기가 반복적으로 오는 것 같다. 그때도 내가 얼마나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을지, 이성적이고 현명한 판단을 항상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이제는 나의 두려움을 내게 이로운 방향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스스로 배우고 훈련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두려움을 자원삼아 내가 더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볼 용기가 생겼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내 앞의 예측불가성에 맞설 수 있는 상당한 자신감이 생겼다고 생각한다.

아직 해결해야할 문제가 남았다.

나의 경험들이 부추겼고, 나의 열등감이 낳은 감정들은 어느 정도 해소할 방법을 찾은 듯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다. 나 스스로도 아직까지 고치지 못했고,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되는 부분은 나의 감정 조절 능력이다. 감정 그 자체는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다고해도, 그 감정들을 나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역량이 아직 부족한 듯 느껴진다. 이렇게 느끼는 이유는 내가 가족들과 이야기를 할 때, 충분히 친절하고 명확하게 의사 전달을 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칠 정도로 감정적으로 반응하면서 이야기하는 상황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한 번은 가족끼리 식사중에 할머니가 음식을 내게 자꾸 밀려하는 모습을 보였을 때였다. 지금 나이도 여든이 넘으셔서 사실상 자신의 많은 부분들이 퇴화되어가는 시기를 보내고 계신다. 그런만큼, 할머니에게 무언가를 타일러드려도 듣지 않으시는(사실 못하시는) 상황이 많다. 나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가족들이 다 같이 밥을 먹을 때 할머니가 반찬을 항상 내쪽으로 미는 것이 매우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의식해서 그렇게 하지 마시라고 이야기를 몇 번했으나, 예전부터 습관이 되신터라 전혀 고쳐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날 직장에서 큰 스트레스를 받고 퇴근해서 집에와서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그날 마침 할머니께서도 저녁을 드시지 않으셔서, 내가 음식을 차리고 식탁에 앉으려할 때, 할머니는 아픈 다리를 주섬 주섬 일으키시며 자신도 밥을 먹겠다고 자리에 앉으려했다. 나는 혼자 밥만 빨리 먹고싶은데, 할머니를 챙겨드려야하는 상황이 너무 싫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머니가 식사를 못하게 할 수는 없으니, 밥그릇을 하나 집어 밥솥을 열고 주걱으로 한 줌 퍼서 담았다. 그것을 할머니 자리에도 놓고, 젓가락과 수저도 놓아드렸다. 자리에 앉고 식사를 하는 와중에 할머니는 계속해서 내게 반찬을 들이밀었다. 자연스럽게 반찬과 거리가 멀어진 할머니는, 반찬을 집는 과정에서 계속 반찬을 식탁에 흘렸다. 나는 너무 짜증이나서 “반찬들이밀지 마시라고 했잖아요!”라며 소리를 질렀다. 평소 귀가 좋지 않으셔서 큰 목소리로 이야기를해야 겨우 알아들으셨기 때문에, 할머니에게 큰소리로 이야기하는 것이 일상화 되어 평소같다면 크게 신경쓰지 않으셨을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목소리가 큰 것 뿐만아니라 큰 짜증이 섞어있었다는 것을 할머니도 느끼셨다. 할머니니는 시무룩해져서 “그래 미안해..”라고 말하며 조용히 밥을 깨작깨작드셨다. 그때 비로소 나도 내가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했다는 생각이들었다. 좋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기분때문에, 스스로 기를 조절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나 스스로도 당황스러워서 할머니한테 죄송하다는 말도 못하고, 한숨만 크게 한번 쉬었다. 그렇게 밥을 먹고나서, 반찬을 치우고 식탁을 정리하는데, 조용히 싱크대로가서 식기들을 설거지하는 할머니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측은해보여 나는 더욱 더 죄송함을 느꼈다. 결국 “할머니 죄송해요..”라고 할머니가 듣기 어려울 정도의 그다지 크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고나서 조용히 내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내가 이런 히스테리컬한 모습을 보인것은 이 때 뿐만이아니었다. 나는 굉장히 많은 별거아닌 상황에서도 특히 가족에게 지나치게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엄마가 집을 나설때마다 현관문을 쎄게 닫는게 현관문에 가까운 쪽에 방이있는 내 입장에서는 매우 거슬리게 느껴진 적이 있었을 때도, 나는 몇 번 가볍게 이야기하다가도 어느 날에는 “내가 문 세게 닫지 말라고 말씀드렸잖아요!”라면서 화를 냈다. 그럴때마다 엄마는 내가 지나치게 예민하다며 나를 비난했다. 거기서 또 말싸움이 일어났다. 덕분에 나와 엄마는 지금까지도 서로 대화를 잘 못한다.

앞으로 가정을 꾸리려면 같이 사는 가족들이 나와 편해야할텐데 지금 이런 모습을 보여준다면 나와 같이 살고 싶어하는 배우자가 누가 있을까 싶다. 내 이러한 기질이 최근 내가 경험한 실패들때문에 더 크게 발현이되는 것인지는 100%확실할수는 없지만, 분명 어느정도의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이러한 실패 경험을 어느 정도 만회하고 괜찮은 직장을 찾았으니, 어떻게해서든 내 히스테리컬하고 예민한 모습을 반드시 제어할 수 있어야한다. 혼자서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설명한 책을 읽든, 명상을 하든, 상담을 받던,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나의 단점을 고칠 수 있도록 노력해야한다. 물론 쉽지 않을 것이고, 상당히 오랜시간이 걸릴 수도 있을 것이다. 다행인 것은 글쓰기를 통해 나의 이러한 단점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어느정도의 원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제 내 문제를 구체화하고 그에 대한 원인을 어느 정도 밝혀냈으니, 이제는 해결책을 찾는 것이 그 이전만큼은 어렵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하루하루 한번이라도 감정에 먹히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감정이 나를 지배하게끔 놔두지 않아야할 것이다. 쉽지 않아도 조금씩 발전해 나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 한번이 두번, 두번이 세번, 세번이 네번이 될 것이라 믿는다. 그렇게 노력하다보면, 열등감이 나를 지배하는 시간이 점점 더 짧아지고, 내가 열등감을 제어하는 상황이 더 많이 펼쳐질 것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이전에 영화 <베놈>을 언급했을 때, 미쳐 강조하지 못하고 넘어간 부분이있다. 그것은 바로 주인공이 베놈을 포용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자신의 운명을 탓하고 저주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기보다는 어떻게하면 그를 달래서 자신과 하나의 육체에서 잘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방법을 모색했다. 뿐만아니라, 베놈의 엄청난 힘을 다른 이를 구하거나 돕는 방향으로 지혜롭게 활용했다. 나는 우리가 열등감을 어떻게 대하며 살아가면 좋을지에 대한 답을 이 영화가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우리안에는 수많은 베놈들이 존재한다. 열등감 뿐만아니라 공포, 좌절, 분노 등등, 우리는 이들을 절대 우리와 떼어놓을 수 없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이들은 우리를 계속 괴롭힐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우리가 그들에게 굴복하며 살아가야한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 또한 이들을 잘 달래고 이용하여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향은 분명이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주인이다. 이 베놈들은 그저 우리가 끌어안고 살아야하는 우리 내면의 아이들일 뿐이다.

우리의 부모님이 우리를 키우느라 얼마나 힘드셨을지 생각해보자. 부모마음대로 되는 자식없듯이, 우리의 감정들도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을때가많다. 하지만, 부모님께서 우리를 잘 키워주셨듯이, 우리도 충분히 우리 내면의 아이들을 잘 훈육하며 살아갈 수 있다. 내 나이가 몇인데 내면의 아이를 이제서야 키우냐고? 걱정마라, 우리는 살면서 우리 내면의 아이를 훈육하는 방법을 거의 배우지 못했다. 모든 사람이 아마 비슷할 것이다. 다행인것은 노력만한다면, 내면의 아이는 실제 아이보다 훨씬 더 성장속도가 빠를 수 있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면, 내 안의 아이는 1년 안에 10살을 먹게될 수도 있고,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이 성숙할 수도 있다. 그러니, 포기하지마라. 우리 부모님도 나를 키우셨는데, 우리라고 우리의 자식을 키우지 못하란 법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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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자(Learner Of Life)

배움은 죽을 때까지 끝이 없다. 어쩌면 그게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배움을 멈추는 순간, 혹은 배움의 기회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순간, 우리의 삶은 어쩌면 거기서 끝나는 것은 아닐까? 나는 배운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배울 수 있음에, 그래서 살아 있음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