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배움 — 먹고사니즘 뒤에 숨겨진 숭고함

배우는 자(Learner Of Life)
18 min readJul 2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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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에 대한 고찰

#먹고사니즘, #생존, # 삶

“뭐 해먹고 살지?”는 어쩌면 생각보다 더 철학적인 고민일 수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한일:

새로운 일을 시작한지 이제 3달째가 다 되어간다. 큰 기대를 안고 새로운 곳에서 다시 전에 하던일로 돌아왔지만, 역시나 세상에 내 생각만큼, 혹은 그 보다 더 쉬운 일은 없었다는 것을 뼈져리게 느끼고 있다.

가장 먼저 맞딱뜨린 어려움은, 일단 직장과의 거리가 멀었다는 사실이었다. 접근성이 좋은 강남에서도 좀 더 안으로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사무실이었다. 따라서 통근도 까다로웠다. 집에서 시외버스를 타기위해 시내버스를 타고가야했고,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강남에 내려서는 서울 시내버스를 타고 좀 더 가야했다. 거기서 조금 더 걸어가야 비로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 반에서 최대 2시간 가까이 걸려서야 직장으로의 편도가 끝난다. 다행스러웠던 것은 직장이 그렇게 통근 시간을 정확히 맞추는 것에 집착하는 문화는 아니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통근이 엄격하지 않은 자유로운 회사의 분위기에 이면에는 생각보다 냉혹한 평가제도가 자리잡고 있었다. 회사의 일은 생각보다 빠른 페이스로 움직였고, 굉장한 꼼꼼함을 필요로했다. 나는 내가 그전에 부트캠프에 참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제는 그 어떤 꼼꼼함을 필요하는 일도 제대로 해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었다. 프로그램을 짜고 코딩을 하는 일은 조그만한 실수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몸 담은 직무는 PM이라는 직군이다. 효율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도록 리소스를 관리하는 일을 말한다. 이 일은 매우 치밀하면서도 꼼꼼해야하고, 조그만한 실수가 문제가 될 수 있으므로 상당한 의사소통 능력을 요한다. 지난 번 나의 부트캠프를 회고하는 글에서 나는 나의 의사소통능력 부재에 대한 숙제를 안았다고 고백했다. 그 때의 문제가 다시 드러난 것일까? 나는 생각보다 내게 떨어지는 지시 사항을 빨리 캐치하지 못했다. 나는 일을 배우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회사의 제품과 서비스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아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틈만 나면 회사 제품에 대해 공부하고 시간을 좀 더 써서 나를 좀 더 유용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 역시 성에 차지 않았는지, 팀장은 내게 수습기간을 연장해야할 것 같다고 말했다. 보통 회사는 수습기간 동안 고용된 이가 일을 잘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기간으로 가져간다. 하지만, 왠만해서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한 보통 이 기간을 잘 끝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다만, 이 회사는 이 기간을 좀 더 심각하게 가져가는 듯했다. 이 기간 동안 매우 철저하게 개인의 의사소통능력을 중점적으로 평가하여 계속 일할 수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 이곳의 시스템이라고 했다. 그 기준에서 내가 미달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혹시 내가 수습기간을 못 버티고 나가야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불안감이 나를 다시 엄습하기 시작했다. 부트캠프를 공식적으로 한 프로젝트 앞두고 수료하지 못한채로 나왔기 때문에, 이제 여기서 나오면 내가 전에 몸 담았던 부트캠프에 대한 경험을 내세워 다시 새로운 일을 하기도 뭐하다. 내가 부트캠프를 중도에 하차하면서 계약서를 통해 법적으로 “수료"를 했다는 말을 쓸 수 없다는 조항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할까? “정말 나라는 인간은 답이 없는 걸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아직 연장된 수습기간으로 인해 1달 남짓한 기간이 남았지만, 내가 살아남아 그 회사의 정직원으로 남을 수 있을지, 또 남더라도 그곳에서 불편한 마음으로 다니지 않을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이번에 또 실패한다면 이제는 무엇을 해야할지 정말 답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이곳에 겨우 정착한다고 해도 이렇게 숨막히는 환경에서 내가 즐거운 마음으로 일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세상이 조금 원망스러웠다. 도대체 왜 하루 하루 “살아남는 것”을 걱정하면서 불편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생계를 유지해야하는걸까? 좀 더 편한 마음으로 “먹고사는 것"을 걱정하지 않으면서 내가 조금이라도 더 편한 마음으로 즐겁게 일할 수는 없을까? 언제까지 밥줄 끊기는 것에 대한 위협의 손바닥안에서 놀아야하는 것일까?

내가 사는 한국은 전 세계 그 어느나라보다 경쟁을 당연시 여기며, 그 경쟁에 대한 결과를 아무런 불만없이 받아들여야한다는 믿음이 상당히 강하다. 비록 그 경쟁이 출발선부터 불리하거나, 부정한 환경에 의해 나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수긍해야한다. 그것에 대한 불만을 내거나 목소리를 내면 “프로불편러", “남탓만 하는 한심한 놈"이라는 소리를 듣기 일수다. 취업이 잘 되지 않는 청년에 대한 복지나, 실업자의 재취업을 돕기위한 실업급여제 같은 것들도 “왜 내 세금을 낭비하냐?”며 반발한다. 자신이 정말 필요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회적 제도를 만들고 정비하기 위해 세금을 내는 것이라는 사실은 잊어버린채, 당장 자신이 필요없다는 이유로, 그 제도를 악용하는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반대한다.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어쩌면 “각자도생(各自圖生)”은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우리가 정말 이 사자성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는 의문스럽지만). 능력에 따라 보상을 받고, 능력이 없으면 그 만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경제체제이다. 이 시스템은 더 큰 보상을 받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열심히 노력하며 살게 만들었다. 물론 그 것은 분명한 자본주의의 강점이다. 문제는, 가진자와 못 가진자의 갭이 점점 커지면서 능력을 입증하지 못한사람은 많은 보상을 받지 못하는 문제를 떠나, 점점 더 오르는 물가와 생활비용 때문에 생존을 걱정해야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능력이라는 것은 매우 주관적이며,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나 사회적 배경에 따라서도 무엇이 “좋은 능력"으로 평가되는지에 대한 기준이 매우 다르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한국에서 일약 슈퍼스타로 떠오른 철학자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l)교수는 최근 <공정하다는 착각(Tyranny of Merits)>에서 능력주의의 어두운 그림자를 조명했다. 농구를 잘하는 마이클 조던이, 테네시주로부터 환경미화원 표창장을 받은 마이클 브라운씨보다도 더 값어치 있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은, 단지 “농구를 잘하는 능력”이 “청소를 잘하는"능력 보다 더 가치있게 받아들여 질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청소를 잘하는 사람을 보러 돈을 내고 그가 일하는 모습을 생중계하는 방송을 보려는 사람보다, 조던이 시원한 덩크슛을 꽂아 넣는 것을 보기위해 돈을 내려는 사람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사실 능력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능력에 대한 가치는 절대적이다.

내가 진정으로 안타까운 것은 브라운씨가 은퇴할 때까지 일을 하더라도, 그가 아무 문제없이 죽을 때까지 금전적 걱정을 하지 않고 살 수 있을지에 대해서 확신을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브라운 씨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을 시작하고 헛된 돈을 쓰지 않고 살았다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그가 아이를 갖고 아이를 키우면서 대학까지 보내려한다거나, 가족을 위한 집을 사야한다거나, 자신이나 가족의 건강이 나빠진다면 상당한 비용이 들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조던은 1년만 일해도 브라운씨가 10년을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고 모아야 할 돈을 벌 수 있으며, 농구 경기 뿐만이 아니라 영화 및 TV쇼 출연, 광고나 유니폼 개런티 비용 등을 통해 벌 수 있는 부가적인 수입도 매우 상당하다. 그는 몇 년만 열심히 일한다면 자신은 물론 3대 이상 걱정없이 살 수 있는 금액을 모을 수 있으며, 상당히 사치롭게 살더라도 죽을 때까지 밥줄이 끊기는 것을 걱정하며 살지 않을 수 있다.

물론, 조던의 엄청난 보상의 이면에는 많은 노력과 다른 많은 농구 선수들의 실패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어떠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사회에서 가치있게 여기는 능력의 기준에 따른 매우 다른 평가로 인해, 먹고 사는 것에 대한 걱정을 벗어날 정도로의 보상을 받기 조차 힘들 수 있다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은 이런 정글식 자본주의다. 우리나라도 이런 자본주의를 받아들였으며, 역사적으로 이와 반대되는 이념을 매우 경멸해 왔기 때문에, 이러한 시스템과 한경이 매우 자연스러우며 정의로운 세상을 실현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사람들은 믿는다.

열심히 일하면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고 잘 살 수 있다는 것은 얼마전까지는 유효했을지 모르나, 부동산이 굉장히 큰 경제의 중심축이 된 한국(서울 및 수도권)에서는 절대 노동소득 만으로 주거지를 마련할 수 없을 정도의 환경이 되었다. 노동이 만들어 내는 소득이 자본이 창출하는 소득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믿음이 사람들 사이에 커져가면서 최근에는 열심히 일하는 것 만으로는 걱정없을 만큼의 소득을 올릴 수 없다는 믿음이 팽배해졌다. 아마 그것이 전 세계 어느나라 보다도 한국이 비트코인 및 주식에 대한 관심이 큰 사회가 된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열심히 일하는 것 만으로 집조차 마련할 수 없는 환경이 된 사회에서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성장동력을 잃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인지 모르겠다. 열심히 공부해서 사회에 나왔는데 남들이 우러러보는 직장에서 일해도 월급쟁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게된다. 월급쟁이가 월급이라도 많이 받으면 좋으련만, 자신이 일하고 있는 수도권에서 직장과 너무 멀지 않은 곳에 집을 마련하려고 하면, 소득을 최소 10년 동안 한푼도 안쓰고 모아야 겨우 살 수 있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집값이 싼 지방에 집을 사고 정착하기에는, 지금 내가 누리는 만큼의 복지를 보장하는 직장을 찾기가 너무 힘들고, 인프라 및 교육 여건도 제대로 갖추어 지지 않은 곳에 마냥 내려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냥 결혼이고 집이고 다 포기하고 내 앞가림이나 하며 살자는 생각에 “플렉스”라고 하는 과소비 문화가 생기고, 사회는 이런 사람이 딱하다는 생각을 못하는지 집값 및 생활물가는 이기적으로 계속 오르기만 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그러니,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생기면 사람들이 일상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을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열심히 일하면 잘산다는 믿음보다는, 열심히 일하면 훌륭한 노예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더 커지지 않을까? 마치 유럽에서 르네상스가 끝나고 암흑의 중세(Dark Age)가 찾아온 느낌이다.

내게 책임져야할 아내와 아이가 없다는 사실이 다행이라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을 꿈꿀 수 조차 있을지 모르겠다. 적어도 지금 나의 상황에서는 나의 생존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 어느샌가 소위 평범하게 직장을 가지고 가족을 꾸리고, 자신의 집을 가진 성공한(평범한) 사람들이 내 눈에서 너무 멀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들과 나 사이에 있는 차이를 인정하기로 했다. 그 차이를 인정하면서 나는 내가 할일을 하면서, 내게 주어진 환경안에서 최대한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살자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회사에서도 기계처럼 일하는 것보다 내가 할일은 책임을 지면서 하되, 퇴근을 하고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일과 삶의 균형을 잘 맞추어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로 전략을 틀었다.

하지만, 나의 이러한 소소한 바램조차 이 사회에서는 사치가 아닐까하는 생각이들었다. 내가 다닌 거의 모든 직장에서 나는 대부분 상당한 시간 야근을 해야했다. 그리고 그 것은 매우 당연했다. 야근을 하지 않는 사람은 의지가 약한 사람처럼 알게 모르게 비춰졌다. 아무리 워라벨이 잘 지켜지는 회사라고해도, 도저히 퇴근 시간까지 끝낼 수 있지 않은 양의 일을 물려받기 일 수 였다. 당연히 일을 끝내려면 야근을 할 수 밖에 없었고, 회사는 그것을 52시간 포괄임금제라 하여 법적 초과 근무 시간에 대한 보상을 해 줄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을 하지 않으면 나에 대한 평가가 좋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되면 내가 지금 일하고 있는 자리조차 보전하기 힘들 것이다. 내 밥줄이 끊기면 안된다는 마음으로 싫더라도 버틸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 지는 것이다. 충분히 쉬지 못해 일의 능률이 떨어져도 쌓이는 일을 쳐내기 위해 나의 휴식시간을 더 투자해서 살아남기 위해 버틸 수 밖에 없는 것이 매우 냉혹하고 비인간적인 현실인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성공확률을 높이면 되지 않냐고 말이다. 나도 얼마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최근에 유명한 전 농구선수이자 현 연예인인 서장훈씨의 한 강연을 듣고 생각이 바뀌었다.

나는 최근에 “대화의 희열”이라는 프로그램을 접했다. 사회 여러 분야의 유명인이나 영향력있는 사람들을 모시고 그의 삶에 대해 대화 형식으로 인터뷰를 하는 프로그램이다. 여기서 서장훈씨가 나온 에피소드를 접했다. 당시 그는 “어떻게 해서 성공할 수 있었냐?”라는 다소 진부한 질문에 매우 진부하지 않은 대답을 했다.

“저는 솔직히 말하자면, 즐기는 사람이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제일 싫어합니다. 저는 살면서 그것 만큼 뻔한 거짓말은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 좋은 농구선수가 되기 위해 노력하면서 절대 내가 하는 일을 즐겨서는 잘 할 수 없고, 좋은 결과를 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히려 그 일이 정말 진저리가 날 정도로 연습을 해야 내가 그 분야에서 낼 수 있는 가장 좋은 성적을 낼까 말까한 경지에 겨우 이를 수 있게 된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절대 즐기는 사람이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엄청나게 연습하고 노력하는 자만이 가장 좋은 결과를 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좀 더 큰 혼란에 빠졌다. 그냥 즐기기만 해서는 절대 목표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을 만큼 노력해야 하는데, 그렇게 한다고 해도 “좋은 결과를 낼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지, 절대 좋은 결과가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더 이상 쳐다보고 싶지 않을만큼 고통스럽게 노력을 해야 겨우 그 일을 잘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일 뿐이라니, 그럼 노력을 해도 안되면 노력을 할 이유가 있을까? 물론, 노력하지 않으면 잘 할 수 있는 가능성도 높아질 수 없겠지만, 겨우 노력해도 가능성이 얼마나 올라갈 지 모른다면 노력하기 위한 동기 부여가 너무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 세상은 즐기면서 노력하며,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게 살기는 어려운 것일까? 행복할 가능성을 높이려면 엄청난 두려움과 고통을 반드시 마주해야만 하는 것일까?

나는 또 유명한 소통전문가 김창옥 교수의 강연을 즐겨 듣는 편이다. 매우 유머스러우면서도 말의 뼈대를 잃지 않으며 사람들에게 적절한 공감과 위로, 조언을 하는 그가 매우 존경스러웠기 때문이다. 최근 나는 그의 한 강연에서 먹고사니즘에 대한 나의 편견과 생각을 송두리째 흔드는 이야기를 들었다.

“저는 사실 강연하는 것을 크게 좋아하지 않습니다. 강연은 정말 극한의 정신적 노동이거든요. 제가 여러분 앞에서 해야할 말을 준비하는 것도 힘들지만, 제가 강연에 어떤 분들이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준비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강연을 하면서도 여러분의 표정이나 감정에 따라 다른 이야기를 해야할 필요도 있고요. 저는 앞에서 준비한 말을 하면서도 여러분이 제 말에 공감을 하는지 계속 확인합니다. 공감하지 못한다면 또 공감할 수 있는 말이나 이야기를 생각해 내야하고, 그 말이 메시지가 있는 말이 되도록 마무리를 지으면서 제가 강연에서 하는 모든 말에 책임을 져야하거든요. 혹시나 제가 하는 농담이 기분이 나빴다거나 선을 넘으면 관객들의 신뢰를 잃기도 매우 쉽고요, 그래서 말을 계속 해야하지만 그렇다고 무책임하게 아무말이나 할 수는 없어요. 강연이 진행되는 약 2시간 동안 저는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합니다. 그리고 이런 강연이 하루에 적어도 2번에서 많으면 4번 정도 혹은 그 이상 이루어집니다. 이 강연을 일주일 내내, 한 달 내내 한다는 것은 정말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이고, 저를 밥먹여 주는 일이기 때문에 계속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행인 것은 그렇게 열심히 일하다보니, 한달에 일주일 정도는 쉬어도 될 정도의 여유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일주일 동안 저는 저의 고향인 제주도로 돌아가서 휴식을 취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악노래도 부르고, 저의 친구들도 만나고, 제가 좋아하는 바다에도 가고 말이죠. 하지만 그러한 여유를 얻기 까지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요. 여러분도, 아주 돈이 많거나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현실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기는 매우 힘듭니다.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위해 내가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할 일을 하는 시간이 더 많을 것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계속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세요. 그걸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돈을 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해야할 일을 반드시 해야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한 시간을 번다는 생각으로 해야할 일을 충실히 하면서 살아간다면, 어느 순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잘 갖추어져 나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먹고사는 일은 생각보다 가볍지 않으며, 오히려 매우 숭고한 일입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다시 나의 자세를 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버는 돈으로 집조차 살 수 있는 세상은 아닐 수 있고, 하루 하루 생계를 걱정해야하는 상황에 언제든지 놓일 수 있는 세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내게 조금이라도 있는 것, 그 시간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 만으로도 아직 내가 행복할 수 있는 희망이 남아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하는 일을 즐기지 못하고,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열심히 해야하는 상황이 펼쳐질 수 있지만, 그 일을 통해서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자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비록 그 자원이 나만의 집을 얻기에 부족하거나, 엄청 비싼 것을 살 수 있을 만큼은 아니라고해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살 수 있을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어쩌면 나만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희망을 얻기위해, 나만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시간을 벌기위해 나는 일하는 것이 아닐까?

이 말이 다른 사람에게는 얼마나 좋게 들릴지 모르겠다. 노동력으로 돈을 얻고, 그 돈을 통해 내가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을 산다는 개념은, 어떤 이들에게는 결국 노예의 삶과 다름이 없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은 매우 가혹하고 비열해서 열심히 일해도 집하나 사기 쉽지 않고, 너무나 많은 일에 치여 분노와 피로함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는 우리가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는 것이며, 그 것을 할 수 있는 기회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비록 그것을 오래 많이 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당장은 없을 수 있지만, 내가 열심히 일함으로써 그 여유를 벌 수 있는 기회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에게는 더 행복해 질 수 있는 희망이 분명히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 행복을 얻기 위해서 정말 지겨울 정도로 한 분야에 매진에서 성과를 낼 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원래 삶은 자세히 보면 오랜 고통 끝에 오는 커다란 기쁨으로 이루어져있다. 태릉선수촌 운동선수들이 4년 동안 노력해서 올림픽에 참가해 메달을 얻는 것은 불과 1주일도 안되는 기간에 이루어진다. 노벨상을 수상한 과학자들도 그 상을 타기 전 수십년간의 수많은 실패로 얼룩진 연구와 실험을 겪었다. 수 km의 마라톤은 결승선이 보이는 100m 이내의 지점으로 가기 전까지는 끝이 보이지 않는 고난의 연속이다. 하지만, 이러한 장기간의 고통을 견뎌 얻은 보상은 순간에 받게 되지만, 그 여운은 매우 오래간다. 그것은 그 상이 주는 금전적, 명예적 보상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들이 낸 성과는 그들의 노력에 대한 인정이며, 그들이 살아온 삶에 대한 커다란 긍정이다. 그들이 올바르게 살아왔다는 것, 다른 이들에게도 본보기가 되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이 그들의 보상 뒤에 있는 커다란 보람이며 기쁨이 되는 것이다. 한 인간이 살면서 이룰 수 있는 가장 큰 보상, 그것은 자신이 한 일로부터 받는 인정이며 감사다. 그가 이룩한 성과는 그 사실에 대한 증표일 뿐이다.

“먹고사니즘"은 피할 수 없는 문제이지만, 동시에 나에게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기회의 의미가 될 수도 있다. 내가 무엇인가에 매진해서 성과를 낸다면, 비록 그 과정은 매우 고통스럽더라도 그것을 통해 얻은 보상으로 먹고사는 문제 뿐만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매진한 일에 성과를 내어 인정을 받는다면, 그것을 통해 나는 커다란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잘 못 살아오지는 않았다는 것, 누군가가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삶을 살았다는 것, 그 사실을 인정 받는 것만으로 매우 큰 행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그로 인해 살아남는 것조차 걱정을 하게 되는 현실은 분명히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을 급격하게 바꿀 수 없다면, 현실을 바꾸려는 노력을 평행으로 진행하되, 그 안에서 우리가 조금 더 잘 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지 보는 것이 효율적이다. 그리고 최대한 주어진 현실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이 불공평한 세상에 확실한 펀치를 날리는 일이 아닐까? 계속된 불평과 불만으로 우리의 환경을 탓하기만 한다면, 이 비열한 세상이 우리를 비웃을 수 있도록 놔두는 꼴이다. 이 세상이 우리의 행복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방법은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는 것이다. 나는 “먹고사니즘"에서 그 방법을 찾아보자고 말하고 싶다. 이 것을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게,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수단으로 여긴다면, 생존 문제를 떠나 더 큰 희망을 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역사상 그 어떤 시대든 문제가 있었고, 그 문제는 반복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려는 사람도 분명히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대가 르네상스 시대의 귀환은 아닐 수 있지만, 암흑의 시대같은 환경에서도 분명 희곡은 있었고 영웅을 노래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SNS로 사람들이 초연결되고 지구촌의 모든 소식이 시시각각 빠르게 연결되는 지금은 우리 모두가 영웅이 되기 가장 좋은 시기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세상이 어두워 보여도 그 안에서 빛을 찾고, 주변 어둠에 현혹되기 보다 자신의 빛에 집중하여 그 빛을 최대한 키워보려는 사람, 영웅은 그런 사람이다. 그 빛을 바라보고, 그 빛이 커가는 것을 보는 것 만으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다. 아무리 세상이 우리에게 가혹하게 설정이 되어 있어도, 우리에게 있는 희망을 완전히 뺏어가지 못 한다. 희망이 있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설정값들을 달리 바라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이며, 우리가 좀 더 행복하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런 기회가 존재하는 한, 우리는 더 잘 살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더 행복해 질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절대 그 권리를 놓지 말자.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좀 더 오래 할 수 있는 삶을 얻기 위한 노력을, 그 행복을 위한 희망을 잃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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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배우는 자(Learner Of Life)

배움은 죽을 때까지 끝이 없다. 어쩌면 그게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배움을 멈추는 순간, 혹은 배움의 기회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순간, 우리의 삶은 어쩌면 거기서 끝나는 것은 아닐까? 나는 배운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배울 수 있음에, 그래서 살아 있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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